• [겸재] 8월의 눈
  • 2019. 6. 27. 14:55
  • 8월, 눈내리던 여름 어느날 유겸이와 영재의 이야기.













    '속보입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늘 오후 7시경,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환경학자들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이라고 주장하고있는 한편, nasa에서는 2일 후 빗겨간다고 예측했던 '행성G'와의 행성충돌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있습니다. 바깥날씨상황 이성진기자가 알려드립니다.'


    영재가 천천히 커텐을 걷었다. 정말로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고있었다. 자신이 살고있는 '리엔 보육원'이라 적힌 낡아빠진 간판이 휘날리는 눈발에 삐그덕댔다. 건물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있었다.


    "형, 밖에 눈오는 거 봤어? 살다가 한여름에 눈오는걸 보네."


    유겸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영재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침대에 앉았다. 책상위의 작은 티비에서는 앞다투어 날씨얘기를 하고있었다.


    "약은. 먹었어?"

    "아니 아직."

    "먹어야 살지."

    "이 병 고치지도 못한다는데 약먹고 살면 뭐하냐, 어차피 죽을텐데. 그리고 김유겸 너 내가 준 감기약 안먹었지? 책상위에 그대로 있던데."

    "아, 형 먹이고 먹을거야."


    유겸이 이를 드러내고 민망한듯 웃었다. 그리고 못고친다고 하지말아줄래? 원장쌤이 희귀병이라도 약만 꾸준히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했거든? 유겸이 옆에서 뭐라고하든 약을 삼킨 영재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곤 빠르게 뜨는 뉴스를 찬찬히 읽어나갔다. '내일(12일) 행성충돌 예정, 인류 멸망?' '갑작스런 기상이변, 지구온난화 심각..' '우주가 내린 저주, 지구 종말'


    "형, 이러다 진짜 지구멸망하는거 아냐?"

    "하면어때, 그냥 죽는거지."

    "어우 자꾸 죽는다는 소리 좀 하지마. 누가보면 세상 자기 혼자 다 산줄 알겠네."


    유겸이 커텐을 더 크게 열었다. 눈이 쌓여 흰색의 세상을 만들어가고있었다. 죽기전에 눈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하나. 유겸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




    '긴급속보입니다. 3일 후, 빠르면 내일 자정 행성충돌이 있을예정입니다. 예상되는 행성의 이름은 '행성G'로 크기는 지구의 약 30배인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충돌 시 인구의 대부분이 사망할 것이라 보고있으며 대피방법은 아직 나오지않고있습니다. 자세한 정보는 nasa에서 결과가 나오는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죽는거구나. 잠깐 졸다가 티비소리에 깬 영재는 막연히 생각했다. 방 밖은 소란스러웠지만 영재의 마음은 더 가라앉았다. 그저 유겸이 보고싶었다. 어디간거야 얘는. 영재는 비어있는 옆침대를 멍하니보다 저도 모르게 다시 눈을 붙였다.


    "최영재, 아직 자고있어? 형 왔다."

    "이제 아주 형한테 반말 찍찍 하네?"

    "뭐 어때 영재야 오늘부터 말 편하게 하자!"

    "그걸 왜 니가 정해. 웃겨 진짜."

    "나 피자 사왔는데 줘, 말아?"

    "유겸이형, 사랑합니다."


    유겸이 고개를 크게 젖히며 소리내서 웃었다. 아 형 너무 귀여워. 유겸이 피자박스를 책상에 올려두곤 영재에게 달려들어 뽀뽀를 퍼부었다. 하지말라며 유겸을 밀어대던 영재도 곧 유겸을 다정히 안아주었다.

    여전히 창문 너머의 하얀 눈은 그칠 기세없이 펑펑 내리고있었다.


    "오늘 내 침대에서 같이 자자."

    "어?"

    "이상한 생각하지마. 그냥 잠만 잔다는거니까."


    영재가 눈을 반짝거리는 유겸의 머리에 딱밤을 때렸다. 아! 이마를 문지르며 유겸이 입을 삐죽거렸다. 영재는 그걸 보고 웃음이 터졌다. 귀여운척 그만하고 누워, 자게.


    "나 안아줘."

    "아니 형 그럼 내가 좀 위험한데."

    "빨리."

    "알았어. 이리와."


    유겸이 침대 한켠에 눕자 영재가 바짝 다가와 허리에 팔을 둘렀다. 맞춘듯이 꽉 들어차는 품에 유겸과 영재는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영재가 유겸의 이마, 눈, 코, 턱에 쪽쪽 버드키스를 하자, 유겸이 웃고는 영재의 입술을 찾아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왜 울어, 형."

    "모르겠어."


    유겸이 울먹이는 영재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울지마, 형이 울면 내가 더 울고싶어. 유겸이 영재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눈이 빨개질정도로 숨죽여 울어대던 영재가 곧 유겸의 품에서 서서히 잠들었다.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티비를 켠 영재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도 치직거리는 회색바탕만 뜨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유겸은 일을 나갔는지 자리에 없어 결국 영재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티비는 나중에 유겸이한테 고쳐달라해야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아이들의 방에 들어가 아이들을 깨웠다. 한명씩 화장실로 들여보낸 후 밥을 준비하다 밖을 한번 쳐다본 영재는 아직도 내리는 눈에 한숨을 쉬었다. 유겸이 감기 더 심해지겠네... 혼잣말을 하던 영재는 하나 둘 식탁에 앉는 아이들에게 밥을 나누어주었다.

    평소와 다를바없는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의 아침이었다.


    "여보세요? 형, 약은 먹었어?"

    "어, 먹었어. 너 눈이 이렇게 내리는데 우산도 안가지고 그냥 나갔지? 목도리는 했어?"

    "걱정마. 여기 안추워. 근데 형 오늘 텃밭 나가지말고 집에 있어도돼. 내가 원장쌤한테 오늘 형 쉬게해달라고 말했으니까!"


    전화기에 흐르는 당당한 목소리에 영재가 피식 웃었다. 칭찬해달라는 말에 영재가 웃으며 아이달래듯 몇마디 던져주자 유겸이 애 취급한다며 발끈했다.


    "진짜야, 유겸아. 나랑 싸우고 질질짜던게 엊그제같은데, 형 걱정도 할줄알고. 다컸네, 다컸어."

    "아 진짜 놀리지마, 아 맞다, 여기 있는 형이 그러는데 좀 이따 전화 안터질수도있대. 나 오늘 빨리 집 갈 거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있어야 돼. 알겠지."


    알았어, 와서 얘기해. 영재가 전화를 끊고 방으로 올라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행성G 매우 근접•••대피방법은?' '외부행성으로 인해 통신 어려워' '인류의 종말..절망적' 기사의 말처럼 영재의 휴대폰도 인터넷 연결이 잘 되지 않아 화면이 깜박거리며 자꾸 끊겼다. 영재는 왠지 불안해져 휴대폰을 두고 창밖의 눈을 쳐다보았다. 유겸이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애꿎은 커텐만 꾹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아이들의 저녁을 챙겨주고 방에 들어가 자던 영재가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에 부스스 일어났다. 머리를 넘겨주던 유겸이 활짝 웃었다.


    "잘잤어? 옥상에 눈 구경하러가자, 엄청 쌓였어."

    "그래, 그전에 목도리 하고가. 이리와."


    겨울에 꺼내려고 구석에 박아둔 박스에서 빨간 목도리를 찾아 유겸에게 둘러준 영재는 자신도 목도리를 꺼내 둘렀다. 작년 겨울에 유겸과 함께 샀던 목도리였다.

    고장나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휴대폰과 티비는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이제와서 고치기도 웃기니까. 속으로 생각하던 영재가 유겸이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허술하게 막아둔 옥상문을 열고 유겸과 영재가 올라섰다. 이틀동안 펑펑 내린 눈은 바닥을 하얗게 물들였다. 유겸이 신나서 뛰어다녔다. 야 김유겸, 안넘어지게 조심해! 영재가 소리쳤다.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드느라 지칠대로 지친 두 사람이 옥상 난간에 앉았다. 유겸이 위험하다고 영재를 말렸지만 고집있는 영재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아 최영재 진짜 고집 대박이다. 근데 지금 밤인데 왜 이렇게 밝아?"

    "행성 떨어질때 나오는 빛 때문이라던데."

    "헐 설마 무서워서 그런거 다 찾아본거야?"

    "유겸아, 밤에 불끄고 혼자 못 자는 너보단 용기있어."

    "와 어제는 자기가 먼저 같이 자자고 해놓고."


    영재는 웅얼거리는 유겸을 무시하고 건물 주변을 둘러봤다. 보육원이 산 중반에 있는터라 빼곡한 나무들 위에 눈이 쌓여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냈다. 하늘에서는 알 수 없는 강한 빛이 눈부실 정도로 밤을 밝혔다. 그런 영재를 보던 유겸 역시 조용히 주변을 바라봤다. 저멀리 삐죽삐죽 솟아있는 건물들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정적 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이러니까 우리 처음 만났을때 생각난다."

    "어, 맞아. 그 때도 눈 엄청 내렸는데."


    그 때 너가 나 꼬셔서 여기 데려왔잖아. 영재가 유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근데 형도 따라왔잖아, 그래서 싫다는거야 뭐야?


    "아니 너무 좋다고. 근데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하지? 애들 다 자?"

    "응, 다 재웠어. 원장쌤은 차타고 어디 급하게 가더라. 늦을수도 있대."

    "그렇구나."

    "영재형."

    "응."

    "좋아해."

    "알아."

    "내가 진짜 많이 사랑해."

    "...알아."

    "...근데 왜 또 울어."

    "나도 몰라."


    결국 고개를 떨군 영재는 팔로 눈물을 벅벅 닦고 끅끅거리는 숨을 진정시켰다. 그 모습을 보던 유겸은 말없이 끌어안았다. 괜찮아.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서로를 조용히 위로했다.


    "그냥 우리 지금이라도 지구 밖으로 튈까? 저기 별 중에 하나 골라봐. 내가 우리 형 하나는 데리고 튄다."


    유겸이 영재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영재도 마주보며 웃다, 하늘에 희미하게 떠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나는 달이 좋아. 달은 어두운 밤을 자기 빛으로 밝혀주잖아. 그게 꼭 너같아서, 그래서 좋아해.


    "마지막여름을 너랑 보낼 수 있어서 행복했어, 유겸아."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영재가 조심스레 유겸의 손을 붙잡아 깍지를 꼈다. 유겸은 그에 응하듯 감겨오는 영재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유겸과 영재는 천천히 서로의 눈 안에 둘만을 온전히 담았다. 곧이어 강렬하고 커다란 빛에 붕괴되어가는 건물들과 함께 둘은 눈을 감았다.














    아래의 노래가사를 각색한 글입니다.


    八月の雪が降ったあの日は
    8월의 눈이 내린 그 날은

    ビードロを覗いたようにみえた
    유리를 들여다본 것처럼 보였어

    "ねえ涙がなんか止まんないんだ 昨日から"
    "있잖아, 어제부터 왠지 눈물이 멈추지 않아"

    わずかに、崩壊する都市がみえた
    간신히, 붕괴하는 도시가 보였어

    それは最後の夏でした
    그것은 마지막 여름이었습니다


    初音ミク, 「 ロケットサイダ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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