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뽐재/뽐녕] 시작과 끝
  • 2021. 9. 27. 20:17
  • 그 시작과 끝에 우리는 서있었다.



    🌙 연성소재로 받은 문장 : ‘네가 착하다는 생각은 버려.’
    🌙 뽐재, 뽐녕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은 형이 착하다고 생각하지? 아니, 그거 엄청 이기적인 거야."

    "영재야"

    "나 안 밀어내고 받아주는 거부터 잘못됐어. 형 진짜 못된 놈인 거 알아?"

    "최영재."




    영재는 짐짓 무서운 얼굴을 하는 재범에 움찔거렸지만, 다시 주먹을 꾹 쥐고 소리를 질렀다. 짜증나! 한참 왁왁대던 영재가 잠시 호흡을 고르며 재범을 노려보았다. 재범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결국 영재는 찔끔 나오는 눈물을 숨기려 인상을 찌푸렸다. 형에게 내가 첫 번째가 아닌걸 깨닫게 하는 형이 싫다. 근데도 형이 좋아서, 그래서 더 싫어.

    재범은 그 모습을 가만히 쇼파에 앉아서 보다가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영재가 코를 훌쩍이며 재범의 목에 팔을 둘러 안겼다.




    "진짜.. 형 너무 싫어. 짜증나."

    "내가 싫어?"




    영재가 재범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아니.. 좋아. 재범이 말없이 작은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형도 진짜 이상해. 왜 내가 이래도 싫다고 말을 안 해? 형도 지칠 텐데 차라리 싫다고 해, 안아주지 말고."

    "니가 싫지 않으니까."

    "그럼 좋아해?"




    영재가 고개를 들어 재범을 보자, 재범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영재는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박진영 때문에?"

    "형한테 박진영이 뭐야."

    "형이 이러는 거 진영이형은 모르지? 진영이형한테도 못 할 짓이야."




    영재가 재범에게 벗어나 의자에 앉았다. 재범은 그 모양새를 천천히 눈으로 따라갔다.




    "진영이형한테나 가. 약속 캔슬내서 빡치게 해놓고 아직도 안 갔어."




    영재가 의자를 뒤로 돌려 녹음장비를 만지작거렸다. 쇼파에 앉아있던 재범이 천천히 일어났다. 영재가 뒤에서 들리는 쇼파가죽소리에 입을 삐죽거렸다. 가란다고 진짜 가네, 임재범.




    "너 아직 화났지?"

    "지금 화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얼른 가, 바쁜 일이라며. 나도 작업해야 할 거 있어."




    뒤에서 폰을 톡톡 만지는 소리가 들렸다. 영재는 신경 쓰지 않는 척 컴퓨터를 이리저리 만졌다. 그래, 지금 임재범 머릿속엔 진영이형이 1순위니까, 지금은 내가 물러나는 게 맞지. 영재는 속으로 복잡한 감정을 삼켰다.




    "...나 진영이한테 내일 보자고 했어."




    뭐라고? 영재가 뒤돌아보자 재범이 민망한 듯 웃었다. 너 화 풀어줘야 할 것 같아서.. 이러면 나 약속 캔슬 안 낸 거지? 영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임재범은 이렇게 사람을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러면, 화 풀테니까 나 소원 들어줘."

    "뭔데?"

    "나중에 말할래."




    재범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일단 나가자, 배고프잖아. 영재의 코트를 들어 입혀주고는 재범이 먼저 녹음실을 빠져나갔다. 영재는 코트를 만지작거리곤 따라나갔다. 저 멀리 걸어나가는 널찍한 등을 바라보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











    "형, 나 안아줘. 소원권."

    "여기서?"

    "응.. 안돼?"

    "..아니, 따라와."




    재범이 야외촬영장 뒤편으로 돌아갔다. 영재는 누가 볼세라 빠르게 따라갔다. 창고 뒤에 선 재범이 팔을 벌리자 영재가 웃으며 안겼다.




    "좋냐?"

    "응."




    재범이 배시시 웃는 영재의 머리를 꾹 눌렀다. 단단히 감싸주는 팔뚝이 좋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속으로 영재는 되새겼다. 아무래도 재범이 좋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끈질기게 지켜보는 눈길이 느껴진 영재는 그 눈과 마주치자마자 눈을 꾹 감아버렸다. 진영은 그런 영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










    "아."




    영재야 깼어? 와서 밥먹어, 오늘 애들 다 스케줄 갔어. 진영이 식탁을 톡톡 두드렸다. 영재가 어쩔 수 없이 식탁의자에 앉았다. 그때 마주쳤던 진영의 눈이 아직 잊히지 않았는데. 마음 한 구석에 숨겨놓은 죄책감이 물밀듯 몰려왔다.

    진영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겠어서 영재는 고개를 숙여 식탁 아래의 손가락만 한참 꼼지락댔다. 진영은 반찬을 집으며 그런 영재를 흘깃 쳐다보았다.




    "영재야. 형은 너랑 싸우기 싫어."

    "형.."

    "나는 너랑 사이 안 틀어질려고 재범이형도 포기할 수 있어."

    "..."

    "너는 내가 포기하라고 말하면 포기할 수 있어?"




    쿵 내려앉았다. 그건 불가능했다. 그게 가능했다면 1년 전 진영과 재범이 사귄다고 들었을 때 일찌감치 포기했겠지. 하지만 영재는 상황판단을 할 줄 알았다. 진영이형이 말은 저렇게 해도 재범이형을 포기 못 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티는, 안 낼 수 있어.. 미안해."




    진영이 터트리듯 웃었다. 입은 웃었으나 눈은 웃질 않았다.




    "티를 안 낼 수 있어? 진짜로? 이때까지 니가 한 행동 다 숨길 수 있다고?"




    영재는 고개를 더 숙였다. 손톱 근처의 많은 상처들이 아팠다.











    #










    "아 맞다. 나 오늘 영재랑 형 얘기했다? 걔 형 되게 좋아하더라."

    "..."

    "형은 내가 좋아?"

    "응."

    "편해서 그런 거 아니고?"

    "..."

    "..."

    "편한 것도.. 사랑 아닐까."




    진영은 재범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진영도 정답을 몰라서, 그래서 답을 못했다. 몇 년 동안 봐온 재범의 얼굴이 낯설었다. 편한 것도 사랑이라. 두근거림이 없는 관계가 사랑인가.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형, 확실하게 해. 나는 형 결정 따를 거니까."




    재범의 작업실을 나온 진영이 한숨을 쉬었다. 마음의 준비..해야겠지.

    재범은 그 누구보다 제가 잘 알았다. 연습생부터 함께했던 것도 나였고, 함께 그룹을 준비했을 때도, 그 그룹이 데뷔했을 때도 그 옆엔 무조건 나였다. 울고 웃으며 지내온 둘만의 꽤나 유의미한 시절이 있었기에 진영은 자신이 재범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 진영의 눈으로 봤을 때, 요즘의 재범은 조금 바뀌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영은 알 수 있었다. 줄곧 저를 보던 시선이 영재에게 향하는 걸 봤던 순간, 진영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형이 영재에게 보내는 그 눈빛, 그건 저에게 보내던 시선과 비슷했다. 그 의미가 설령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과 아주 닮아있음을 알았다.

    진영은 기억을 더듬었다. 첫 데뷔 쇼케이스에서 덜덜 떨던 내 손을 꾹 잡아준 임재범, 좋아한다고 고백하자 말없이 꽉 안아주던 임재범. 하나같이 저를 위한 행동에 진영은 그런 재범이 좋았다.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못 말린다는 듯 웃어주는 재범이 좋았다.

    누구에게나 다정했지만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만 주는 다정함. 그 특별함에, 그 달콤함에 나는 내 멋대로 임재범을 내 것이라 당연히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특별함'이 사라진다는 것이 두려워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 혼자 갖고있는거 욕심이려나. 다시 한번 욕심을 부리고 싶었지만, 오늘 형의 그 눈을 보니 예상보다 영재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깊다는 걸 확인해버려서. 진영은 진영대로 충격이었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질투도 아니었다. 뭔가.. 묘했다. 영원히 내 것인 줄 알았던 게 사실 아니었던 걸 깨달은 느낌. 진영은 결국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한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형이 제 눈치를 보면서 마음을 숨기는 건 진영 스스로가 싫었다. 내 눈치 보지 말고 형이 하고 싶은걸 해. 슬럼프에 빠진 재범을 향해 진영이 해준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형의 애인이니까, 형의 의견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었다.












    재범은 작업실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싸맸다. 바닥에는 제가 찍었던 여러 장의 풍경 사진과 진영의 사진, 영재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면서도 그랬다. 둘에게 상처 주기 싫어서. 또한, 그 둘을 진심으로 좋아해서. 재범은 생각을 억지로 미뤘다. 진영이 내미는 손을 제가 꾹 잡아주면 활짝 웃어주는 것에 행복했고 영재가 저 때문에 우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확실히 하라는 진영의 말에 재범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제 마음이 어떤지 스스로 확신이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재범은 사진을 대충 밀어놓고, 핸드폰을 꺼내 가이드를 부르러 오라고 영재를 불렀다. 핑계였지만 그저 그 애가 당장 보고 싶었기에 그 애를 불렀다.



    "고마워, 먼저 가도 돼. 숙소 가서 보자."




    녹음실을 나온 영재가 컴퓨터 쪽으로 뒤돌아 있는 재범을 보았다. 살짝 긴듯한 머리카락으로 덮인 동그란 뒷통수가 예뻤다.




    "형, 나 할 말 있는데, 한 번만 말 할 거니까 잘들어야돼."

    "응."




    재범이 가사 노트에 글을 쓰려다 고개를 들어 바라 보았다. 영재가 코트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감정을 참을 수 없다면 숨기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영재는 눈에 힘을 주었다.




    "나 형 좋아해. 진심으로. 근데 진영이형한테 미안해서, 그래서 그만하려고. 형한테도 괜히 틱틱대서 미안.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마음 안 받아줄 거 알고 말한 거니까 내일부터는 그냥 형동생처럼 .. 평소처럼 대해주라."




    결국 눈물이 터진 영재가 끅끅 올라오는 숨을 참고 팔로 얼굴을 벅벅 닦았다. 곡 마무리 잘하고, 먼저 갈게. 영재는 잡을 새도 없이 뛰쳐나갔다.

    재범은 굳게 닫힌 녹음실 문을 한참동안 멍하니 보았다. 마음이 이상했다. 영재가 제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좋아한다고 했을 때, 눈물이 차오른 그 투명하고 새까만 눈과 마주쳤을 때, 저를 향한 그 마음을 지독하게 느껴버려서, 재범은 가슴께를 꼭 눌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진영아."

    "..."

    "미안해."

    "..생각보다 빨리 전화했네?"

    "우리, 그만하자."

    "형, 진짜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응."

    "알겠어. 앞으로도 그렇게 형 마음 가는대로 해. 나도 그게 더 좋으니까."

    "..고마워."




    전화를 끊고 재범은 영재에게 달려나갔다. 진영은 연결이 끊긴 전화기를 붙잡고 소리 없이 울었다.




    형, 나 사실 좋다는 거, 거짓말이야.










    "영재야."


    재범은 몇 걸음 나가지 않고 한자리에 우뚝 서 있는 영재를 뒤에서 껴안았다. 영재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팔로 얼굴을 가리곤 가만히 서있었다.




    "이러면 나 또 오해하니까 진영이형한테 빨리 가."

    "이제 못 가."

    "무슨 말이야?"

    "진영이한테 헤어지자고 했어."

    "형 미쳤어?"

    "아니. 안 미쳤어."

    "근데 왜 그랬어."

    "그냥.. 그러고 싶었어. 니가 우는 게 싫으니까."

    "형은 나 안 좋아하잖아."

    "좋아해."




    영재는 아무 말 없이 재범의 팔을 붙잡고 또 울었다. 이미 빨개진 눈가가 따갑도록 울었다. 이게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른 채 주체 없이 흐르는 눈물을 쏟았다.










    #











    "영재야, 이리 와봐."

    "진영이형,"

    "내가 말했지? 너랑 싸우기 싫다고."

    "..."

    "너는 포기 안 해서 다행이다."




    ...재범이형 결정 빨리 못 하는 거 알지. 진영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영재가 차오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을 앙다물었다. 그걸 본 진영이 천천히 다가와 영재의 머리를 쓰다듬자, 영재가 팔을 들어 진영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제야 꾹 눌러왔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최영재, 미안해하지마. 내가 놓은 거니까, 그러니까,"




    진영의 말끝에도 떨림이 섞였다. 마음이 식었다고,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제 안에 재범은 생각보다 큰 모양이었다. 진영은 영재를 더욱 끌어안았다. 목 언저리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여전히 어리숙하고 눈물겨운, 그 시작과 끝에 우리는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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