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겸재] 11월의 눈
  • 2021. 9. 27. 20:24
  • 11월, 첫눈이 내리던 어느날 유겸이와 영재의 이야기.


    🌙 '8월의 눈'의 외전편입니다. (https://shining-root-g.postype.com/post/2374966)






    "뭐야, 나랑 자고 싶어?"

    "돈 없어요."

    "하고는 싶다는 거지?"

    "갈데없죠?"




    영재가 눈을 찌푸렸다. 무작정 앞길을 막아서고는 제 질문에 제대로 답도 해주지 않는 키 큰 남자아이가 답답했다. 안 그래도 오늘 눈이 내려 질퍽한 신발에, 내 몸집만 한 가방도 들고 있으려니 짜증나죽겠는데 완전 잘못 걸렸다.




    "야, 싫으면 관두고 좀 비켜."

    "나랑 내가 사는 곳 갈래요? 거기 밥도 주고 일도 시켜주는데."

    "알아서 잘 사니까 신경끄고 갈 길가라."

    "그럼 일단 그.. 그거하고 나서 천천히 그 돈 갚을 테니까 그동안만 저랑 같이 살래요?"




    물이 조금 빠진 분홍색 머리칼이 꽤 날이 선 차가운 바람에 흔들거렸다. 영재는 그 남자애가 어이없으면서도 조금은 귀여워서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이 남자애는 확실히 믿을 구석이 없었긴 했지만 영재는 혹시나 따라가서 장기매매를 당한다 해도 이런 쓰레기 인생을 더 사는 것보다야 좋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무엇보다 안 그럴 애처럼 보이기도 했고. 영재는 하얀 입김을 내면서 간간이 제가 잘 오는지 뒤를 돌아보는 유겸의 발자국을 밟으며 따라갔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지만, 유겸이 영재에게 그날 왜 나를 따라왔냐고 묻자, 영재는 '얼굴에 넘어간 거지.'라며 웃었다.



    그러는 너는 왜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한 거야? 나도 비슷해, 형 처음 봤을 때 뭔가 그래야겠다 싶었어.









    #









    유겸을 따라간 산 중턱에는 투박한 빨간 벽돌을 쌓아올린 큰 건물만이 반겼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네.. 이름 뭐야?




    "김유겸이요, 18살."




    형은요? 참나, 언제봤다구 형이래. 그럼 야, 라고 할 순 없잖아요. 영재는 제 말에 한마디도 안 지는 유겸을 살짝 째려보곤 건물 입구를 바라보았다.




    "리엔 보육원?"

    "내가 사는 곳이에요. 내 동생들도 있고."

    "동생들 앞에서 섹스하자고?"




    유겸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그거 하자는 애가 여기로 데리고 온 거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영재가 당황해하며 유겸을 올려다보았다.




    "됐고, 형 이름 뭐냐구요."




    말하면 인상 풀 거야? 안그럼 나 그냥 갈래. 유겸이 그 말에 인상을 풀었다. 알았으니까 이름이나 말해요.

    ...최영재. 영재가 낡은 팻말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말했다. 어디선가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렸다. 올해의 첫눈이 쏟아지는 11월이었다.









    "영재 형."




    익숙치 않은 호칭에 방을 구경하던 영재가 놀라 돌아봤다. 이를 드러내며 웃던 유겸이 영재에게 다가왔다. 여긴 제 방인데, 동생들 방에 침대가 하나 남아서 여기 넣어놓을게요. 여기서 같이 살면 될 거 같아요.




    "근데 우리 그거 안 해?"

    "안 하면, 뭐, 여기서 안 살 거예요?"




    영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신세를 지고 민폐를 끼치는 건 영재가 가장 싫어하는 일 중 하나였다. 무엇인가를 받았을땐 자신도 꼭 무엇인가 해줘야 한다는 것을 영재는 3년 전인 16살 즈음, 아빠에게 맞고 집에서 뛰쳐나왔을 때 깨달았다.

    영재가 가만히 있자 유겸이 손을 붙잡았다. 그럼 내가 하고 싶을 때 말할게요. 그럼 됐죠? 이제 원장쌤 소개시켜줄게요. 우리 원장쌤 진짜 잘생겼어요.

    영재가 엉겁결에 유겸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갔다. 버려진 공터처럼 꽤 넓은 집 앞마당에는 아이들이 눈을 맞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계단을 내려오자 자신을 박진영이라고 소개하는 젊은 남자에게 영재는 인사를 꾸벅했다.




    "어 반갑다. 19살이라고? 유겸이 또래니까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진영쌤이라고 불러도 좋고 진영이형이라고 불러도 좋아. 유겸이처럼 원장쌤이라고 해도 상관없고. 편하게 대해주면 고맙겠네. 잘 지내보자, 영재야."

    "네.."




    꽤나 서글서글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영재도 살짝 웃었다.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다 나쁜 사람뿐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가 보다. 영재는 속으로 박진영이라는 이름을 한 자, 한 자 되새겼다.

    유겸이 진영을 도와서 밥을 할 동안 쉬고 있으라는 말에 영재는 천천히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꽤 고급스러워 보이고 오래된 것 같은 진열대 위에 유겸과 아이들, 그리고 진영쌤이 찍힌 사진이 놓여있었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 시절 유겸은 어린 티가 났지만, 눈빛은 다부져 보였다.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눈, 영재가 가지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한참 둘러보다 갑자기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아, 짧은 신음을 내고 옆에 있던 쇼파를 붙잡았다. 머릿속이 웅웅거렸다. 영재는 욱신대는 머리를 붙잡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돌아가신 엄마가 알려준 방법이었다. 그게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나이가 됐음에도 영재는 끝까지 약을 먹지 않고 곧잘 그런 행동을 했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 약을 먹지 않았던 건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이었다. 나를 갉아먹는 짓이었지만 아버지가 휘두르는 막대기보다는 나았다. '맞아 죽었다'보단 '병 때문에 죽었다'라고 소문나는 게 낫잖아. 영재는 만취해 잠든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통증은 참아낸다고 익숙해지는 게 아니었다. 찌를 때마다 새로운 상처인 듯 아팠고 마지막에 꼭 기절까지 해야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쓰러지면 분명 유겸이랑 진영쌤이 놀랄 텐데.. 영재는 가방 구석에 처박혀있을 몇 개 안 남은 약이 절실해졌다. 영재는 결국 어지러움에 꺾이는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유겸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재는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 영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을 혼자 하염없이 달렸다.

    영재가 일어났을 땐 유겸이 침대 옆에서 쭈그려 자고 있었다. 유겸의 조금 상한듯한 분홍색 머리카락, 진한 눈썹, 길고 까만 속눈썹, 높은 콧대, 붉은 입술까지 찬찬히 뜯어보곤 영재는 다시 누웠다. 다시 꾼 꿈에서 끊임없이 달리던 영재가 멈춘 곳에는 유겸이 웃으며 서 있었다.









    "..왜 그런지 물어봐도 돼요?"




    싫으면 말 안 해도 돼요, 쉬어요. 유겸이 씩 웃었다. 영재는 일어서는 유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가지마.




    "알겠어요."




    영재는 바닥에 앉으려는 유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같이 누워서 안아줘.




    "응."




    유겸이 이불을 들쳐내고 옆에 누웠다. 팔베개를 해주는 유겸의 허리를 감싸고 꼭 당겨 안았다. 응답해주듯 토닥거리는 손짓에 영재가 눈을 감았다. 응석받이가 된 것 같았다. 이왕 응석 부리는 거 좀 더 솔직해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이렇게 쓰러지는 거 병이야. 뇌에 문제가 생긴 거라는데, 희귀병이래. 어머니가 있을 땐 약도 꾸준히 먹고 그랬는데, 돌아가시고는 계속 안 먹었어. 별로 살 가치를 못느꼈거든. 그러고 나서 한동안 아버지랑 같이 살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맞았어. 술값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면서 아무 데나 마구 때리고.. 그래서 좀 큰 소리 나면 잘 놀라고 나보다 큰 사람이 화내면 무서워 해. 트라우마 때문에..."




    주르륵 이야기를 풀어놓고 나서야 덜컥 겁이 났다. 김유겸이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 나를 버리면.. 어쩌지. 영재는 유겸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유겸의 카키색 셔츠 자락만을 꾹 쥐었다. 유겸은 아무 말 없이 토닥거리던 손으로 영재를 더욱 끌어당겼다. 영재는 그제야 눈을 편안히 감고 잠에 빠졌다. 유겸이 잠이 든 영재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









    며칠이 지나 꽤 생활에 적응한 영재는 유겸이 일을 나간 사이 진영을 도와 요리를 했다. 유겸이 말했던 동생들은 친동생이 아니라 다 유겸이 밖에서 하나, 둘 데려온 고아들이라고 했다.




    "아, 유겸이가 영재 너 약 구해달라고 하더라. 주문해놨으니 오늘 밤 정도에 도착할 거야."




    영재가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해 진영을 쳐다보았다. 근데.. 그 약 되게 비싼데.. 돈은 어떻게.. 더듬거리며 말하는 영재를 보고 웃은 진영은 당근껍질을 벗겼다.




    "사실 유겸이가 이거 말하지 말랬는데, 걔 야근해서 모은 전 재산이라면서 약값으로 쓰라고 돈 내밀더라. 너무 귀여운 거 있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더니, 아니라고 한사코 자기가 내겠다는 거 뜯어말리느라 혼났다니까. 아, 혹시나 말하는 건데 돈 갚으려고 하지 마. 선생님 돈 많다, 영재야."




    진영은 당근을 크게 썰어 보글보글 끓는 카레에 넣었다. 영재는 휘젓던 국자를 꾹 쥐었다. 미묘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였다. 미안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고맙기도, 슬프기도 했다.









    "김유겸, 니가 진영쌤한테 내 약 구해달라고 부탁했어?"

    "아 네. 제가 부탁했어요. 약 왔대요? 저녁 먹고 두 알씩 꼭 챙겨 먹어요."

    "야, 니가.. 니가 뭔데 나 동정해? 내가 픽픽 쓰러지니까 불쌍하냐? 내가 약을 먹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 시키지도 않을 일을 하고 난리야?"




    영재가 진영에게 받은 약 통을 집어 던지자, 알약 봉지들이 유겸의 발밑에 후두둑 떨어졌다. 앞으로 내 병 관련해서 신경 쓰지 마, 짜증나니까. 당황한 유겸이 입을 열려고 하자 영재가 더욱 몰아세웠다. 아, 그만해야 되는데. 영재는 제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뭐라고요? 내가 형 동정한다고요? 지금 내가 형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 같아요?"




    인상을 찌푸리며 벌컥 화를 내는 유겸을 보며 영재의 눈에 눈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나한테 왜 화내, 이 나쁜 놈아! 꺼져! 결국, 놀란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유겸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방울을 닦아내는 영재를 내버려두곤 머리를 헝클이며 방을 나갔다.

    그래, 그건 열등감이었고 구차한 자격지심이었다. 영재도 알고 있었다. 얼마 안 되었지만, 이때까지 봐 온 김유겸은 그런 애가 아니라는 걸, 누구를 불쌍하다며 무시하는 애가 아니란 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태어날 때부터 영재에게 끈질기게 따라붙은 그 '희귀병'이라는 꼬리표는 영재가 유겸의 호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충분했다.

    유겸은 유겸대로 많은 감정이 엉켰다. 영재를 좋아하니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더 챙겨주고 싶은 것뿐이었다. 왜 제가 이렇게 하는지 몰라주는 영재가 야속하고 속상했다. 한편으로는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한테 욱한 마음에 소리를 질러버린 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겁을 먹고 울먹거리는 영재가 자꾸만 생각나 미안함이 물밀듯 몰려왔다. 앞으로 어떡하지. 형이랑 계속 같이 살고 싶은데.. 보육원 담벼락에 기대앉아 눈을 맞으며 가만가만 생각하던 유겸은 결국 울컥 눈물이 터졌다.










    "여기서 왜 청승맞게 울고 있어."




    쭈그려 앉아 눈물을 훔쳐내던 유겸이 고개를 들었다. 유겸의 벌게진 눈가를 보고 영재는 팔을 벌렸다. 이리와.

    그제서야 유겸이 일어나 영재에게 와락 안겼다. 덩치가 큰 탓에 영재에게 안기는 게 아니라 안는 폼이 되었지만, 영재는 제 어깨를 감싸 안는 유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형, 미안해... 화내서... 근데 나는... 형이, 걱정돼서..."




    훌쩍거리면서도 더듬더듬 말하는 유겸의 목소리에 영재가 등을 토닥였다. 알아, 잘못한 건 나야, 미안해. 영재는 목을 더 꽉 끌어당기는 유겸의 넓은 등을 문질러주며 속삭였다.









    #










    어느새 겨울, 봄을 지나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재는 유겸이 울었던 그 날부터 약을 꼬박꼬박 먹기 시작했다. 오늘도 유겸이 약을 챙기려 방문을 열자, 이미 약을 삼킨 영재가 그런 유겸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김유겸 나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 그럼 좋아하지, 싫어하는데 이러겠어?"

    "말 참 예쁘게도 하네, 우리 유겸이."




    메롱. 유겸은 영재에게 혀를 쭉 내밀곤 침대에 뛰어들었다. 그래도 영재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밝아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 유겸은 휴대폰을 하다 씩 웃었다.




    "미안해."

    "엉? 아니 또 뭐가 미안하대?"

    "그냥 이래저래. 자꾸 민폐만 끼치고."




    방금까지 영재가 밝아졌다고 생각했던 유겸이 울상을 지으며 영재를 바라봤다. 영재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만 꼼지락댔다.




    "형, 나한테는 민폐 끼쳐도 괜찮아, 나 민폐 당하고 싶어. 형이 나한테 민폐 엄청 끼쳤음 좋겠어."




    그 말에 웃음이 터진 영재가 곧 유겸을 꽤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꼭 하고 싶었고, 해야 하는 말이었다.




    "유겸아, 나 진짜 너 만나고 생각이 되게 많이 바꼈어. 나는 내가 이렇게 감정이 다양한지 처음 알았어... 근데... 반대로 너한텐 내가 짐일까 봐, 그게 무서워."




    ...형, 내 눈 봐봐. 영재가 푹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아, 결국 유겸이 일어나 영재의 침대에 앉았다. 두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고개를 돌리게 하자, 영재가 눈을 내리깐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부터 미안하다는 말 금지야. 차라리 고맙다고 해. 그리고 벌써 이러면 어떡해. 나 형 좋아하니까 앞으로 더 해줄 건데, 그건 어떻게 감당하려고?"




    영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유겸이 그대로 얼굴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제 옷자락을 살짝 잡는 영재의 손을 본 유겸은 두 팔을 붙잡아서 자신의 목에 둘러주었다. 천천히 영재의 허리를 감싼 유겸은, 살짝 감은 눈 사이로 파르르 떨리는 영재의 속눈썹을 눈에 담았다. 영재에게 제 마음을 온전히 전해주고 싶었다. 형이 앞으로도 나와 함께 있어주기를, 그리고 누구보다 행복해지기를 유겸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형 나 방금 소원 빌었는데, 뭐라고 빌었게?"


    "...좋아해, 유겸아."


    맞았어. 유겸은 빙긋 웃으며 영재를 꽉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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