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30분이라기엔 넘치고, 35분이라기엔 모자라다.
🌙 뽐재전력에서 '1:31 AM(잘 지내야 해)'라는 주제를 가져왔습니다.
🌙 새드엔딩주의 ..
영재는 오후가 다 되어서야 내리쬐는 햇빛에 겨우 눈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조금 귀찮았지만 오늘은 꽤 중요한 날이라, 영재는 하지도 않던 스프레이를 들고 머리를 매만졌다.
"...나 진짜 별 걸 다한다."
영재는 머리를 까서 넘긴 제 얼굴을 거울로 뚫어지게 보다 헛웃음을 터트리곤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집을 나섰다.
"총각, 오늘 왜 이렇게 예뻐, 여자친구 만나러 가?"
"아, 안녕하세요, 그냥 친구 만나러가요."
영재는 어색하게 웃으며 옆집 아주머니께 인사를 했다. 너무 멋부렸나... 까만 코트를 정리하며 영재는 휴대폰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고등학교 제 17회 동창회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날짜:1/31 시간:오후7시 장소:○○고기집』
"요새 어떻게 지내?"
영재는 민지의 물음에 어색하게 웃었다. 이래서 오고 싶지 않았던 거였는데. 영재는 머릿속으로 대답을 천천히 골랐다.
"그냥, 작은 바에서 노래하고 있어."
"아 진짜? 고등학교 때부터 가수한다더니, 아직도 노래하나보네."
그 이후에 질문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노래를 한다고 하면 대단하다고 해줬던 고등학교 시절과는 다르니까. 영재는 그걸 잘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또 다른 질문이 없는 것이 감사할 정도였다.
"아 맞다, 영재야. 너 오늘 재범이 온다는 거, 들었어? 지금 드라마 찍고 있을텐데 그렇게 바쁜 애가 어떻게 온다는거지?"
영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그 소문 때문에 제가 이 어색하고 껄끄러운 동창회에 나오게 된 거니까. 이미 고깃집 안은 임재범의 이야기로 가득 차있었다. 한창 인기몰이 중인 남자배우라고 하면 모두 임재범이라며 입을 모았다.
아.
웅성거리는 입구를 슬쩍 쳐다본 영재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칠 뻔 했다. 환히 웃으며 친구들을 안아주는 재범을 멍하게 보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너무 그대로야. 영재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재범은 저를 봤는지 못 봤는지 조금 떨어진 대각선에 자리를 잡았다. 영재는 앞 접시에 놓인 고기를 꾹꾹 눌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맛있었는데, 이젠 하나도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도 영재는 눈을 접시에 고정한 채 억지로 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최악이야. 오지 말걸.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영재는 결국 한숨을 쉬며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깃집 구석의 담벼락에 기대 가만히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뛰어나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걔였다.
"...오랜만이네, 영재야."
"응."
날카로운 바람이 볼을 스쳤다. 재범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피는구나. 영재는 그런 재범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내미는 재범의 손을 잠깐 보다 영재는 고개를 저었다.
"안 펴?"
"응."
"아, 너 담배냄새 싫어했지? 끌게, 미안."
영재는 입술을 꾹 깨물고 애써 고개를 저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죽도록 싫지만 그 사람이 임재범이라면 또 달랐다. 제가 아무리 괜찮다고 우겨도 결국 담배를 꺼버린 재범을 보며 영재는 또 입술을 깨물었다. 그놈의 배려, 그놈의 다정함. 그것 때문에 나는 그 3년 동안 아직도 임재범을 잊지 못하고 살았던 거였다.
"...야, 임재범."
"어?"
"다정한 척 하지마."
끝을 흐리는 목소리에 당황한 재범은 고개를 숙여 영재의 얼굴을 살폈다. 그럴수록 고개를 더 푹 숙인 영재는 울컥 올라오려는 감정을 꾹 삼켰다. 나는, 너 잊으려고 온갖 짓을 다했는데, 왜 너는.
"영재야."
"왜 너만 멀쩡해? 우리 헤어졌잖아. 근데 왜 그래."
"...내가 진짜 멀쩡했으면 여기 안 왔어."
영재는 말문이 막혀 재범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까만 머리카락 밑으로 진한 눈썹이 도드라져보였다. 영재가 재범을 마지막으로 봤던 날, 재범은 바빠질 거라고 말했다. 캐스팅되었던 소속사에 들어갔고 첫 드라마도 시작하니 만날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을거라 했다. 영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임재범은 바쁘니까.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다. 재범은 아무 말이 없었고 영재는 울음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꾹 눌러 잡았다. 사실 영재는 재범을 두고 돌아설 때까지도 재범이 저를 잡아주길 바랐다. 매사에 이성적인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정적이 흘렀다. 이제는 둘 사이에 메꿀 수 없는 공간이 많이 생겼다. 고개를 푹 숙인 영재는 괜찮아질 거라고 토닥여주던 친구의 위로가 생각이 났다. 지랄. 그럴수록 더 또렷해졌고 티비에 나오는 얼굴이 잘 때마다 둥둥 떠다녔다.
"보고싶었어."
담백한 고백에도 영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라서, 그래서 들지 않았다. 차라리 말을 거는 재범을 모른 척하는 게 더 좋았을 뻔했다. 아니, 그냥 이 동창회에 나오지 않았어야 했다. 끝이 보이는 만남은 애초에 시작을 말아야 했는데.
“...야, 너 이번에 한다던 드라마는 잘 돼가?”
“어? 아, 어어, 그냥 하는거지 뭐.”
“그래, 파이팅하고... 난 가볼게.”
“벌써 가게? 좀 이따 가지.”
“몸도 안 좋고 그래서. 맛있게 먹고 가.”
“그, 영재야, 폰 번호... 알려주면 안돼?”
영재는 주머니 속에 잡히는 휴대폰을 꼭 쥐었다. 뿌옇게 나오는 입김 너머로 재범의 간절한 눈이 보였다. 영재는 머뭇거리다 그냥 한 번 웃었다.
“미안, 재범아, 이해하지?”
“어, 알지, 잘 가. 오늘 반가웠다.”
영재는 손을 흔드는 재범을 보며 끝까지 웃다가, 뒤돌자마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재범에게 들키지 않도록 앞만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며칠 뒤, 영재는 고등학교 때 함께 했던 밴드부 형들과 첫 버스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도와줄 주변사람이 많다는 건 참 행운이었다.
"형, 버스킹 홍보 했다면서요?"
"당연하지. 인스타랑 페북이랑 온 동네방네 소문냈어. 얼마나 올진 모르겠지만."
최영재, 사람 없어도 실망하지 마라? 영재는 말없이 씩 웃었다. 사람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다. 어쨌든 노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그것만으로 영재에겐 큰 선물이었다.
준비의 마지막으로 마이크 음량을 조절하는 동안 사람들 몇몇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영재는 목을 가다듬고 꾸벅 인사를 한 뒤, 천천히 흘러나오는 반주에 눈을 감았다.
"잘 지내야 해. 아프지도 말고, 항상 웃는 모습 절대 잃지 말고."
영재는 며칠 전 동창회에서 만났던 재범이 떠올랐다. 애초부터 재범을 생각하며 쓴 가사였다. 재범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재범을 위한 노래.
"혹시나 힘들어질 때면 다시 찾아와도 돼. 나 여기 그대로 이곳에서 널 떠나지 않아."
이건 거짓말이었다. 재범이 저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재범은 앞으로 지금과는 다른 세상으로 나가야 하니까. 거기에 상처받는 건 저 혼자라 해도 그게 맞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떴을 때, 마주친 두 눈에 영재는 노래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 왔어?”
“너 버스킹 한다길래... 할 말도 있고.”
미안, 민폐였나. 재범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영재는 마주 웃어줄 수가 없었다. 재범과 눈이 마주친 뒤로, 노래를 멈춰버린 저 때문에 버스킹은 흐지부지되어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형들은 어쩔 줄 몰라하는 저를 이해해준다는 듯 재범에게 어서 가보라 눈짓을 줬다.
“할 말이 뭔데?”
"어... 영재야, 나 사실,"
"야, 혹시나 말하는데 우리 뭐 다시 만나자거나 그런 말 하지말자. 안 그럼, 내가 너무 상처받을 것 같아서."
그 말에 재범은 눈 밑까지 올렸던 까만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영재는 그런 재범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쌍커풀 없는 눈 두덩이 위로 콕콕 찍힌 두 점이 눈에 띄었다. 그 두 점을 나만의 것이라 여겼던 날이 있었다. 이제 나의 두 점은, 나의 임재범은 없다.
“...헤어지고 후회했어. 그 때 너 붙잡을 걸 이런 생각도 많이 하고,”
“임재범,”
“진짜, 한 번만, 봐주라. 다시 만나자, 어?”
영재는 재범의 간절한 눈빛을 피했다. 자꾸만 틈을 주는 재범이 미웠다. 보고 싶어서 동창회에 간 건 맞지만 보고 싶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고, 붙잡고 싶었지만 진짜 붙잡아주길 바랐던 건 아니었다.
“정신차려, 너 연예인이야. 그 바닥에서 쓸데없는 소문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다 감당할 수 있어?”
나는 임재범의 걸림돌일 뿐이다.
“어, 감당할 수 있어.”
“...난 못해, 재범아.”
앞으로 이렇게 찾아오지마. 영재는 재범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뒤돌아 걸어갔다. 재범은 울지도 못하고 영재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손이 벌게지도록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자리로 돌아와 장비를 정리하던 영재는 무슨일이냐며 걱정스레 물어오는 형들에게 애써 웃어주며 고개를 저었다.
최영재의 첫 버스킹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이후로 영재는 다시는 동창회에 가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을 했다. 제가 얻고자한 것보다 잃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영재는 일을 하다, 가끔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가 뜨면, 잠시 고민하다가 받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잃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저 사람, 임재범 아니야?"
가게 마감을 한 뒤, 바에서 나온 영재는 들려오는 이름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웅성웅성거리며 점점 몰리는 인파들 사이에서 당황해하는 임재범이 보였다. 영재는 성큼성큼 걸어가 재범의 팔을 낚아채서 다시 바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야, 내 말 이해 못했어?"
좀 꺼지라고. 울먹이는 영재를 급하게 재범이 껴안았다.
"진짜 짜증나, 임재범, 멍청하게 굴지마, 부탁이니까."
울먹이면서도 밀어내는 영재를 힘을 주어 더 꽉 끌어안은 재범은 정신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쏟아냈다.
"너가... 앞으로 보러오지말라고 그랬을 때, 도저히 못 할 것 같아서 진짜 딱 얼굴만 보고 갈려고 그랬어, 미안해, 영재야."
영재가 어깨를 있는 힘껏 밀어 재범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야, 니가 진짜 미안하면 이렇게 오지도 못 해. 나 일 그만 둘 거니까 앞으로 여기도 오지마. 지금이라도 좋게 끝내자."
"한번만... 다시 생각해주면 안될까."
"이제 와서 왜 이래? 요새 연애 못하니까 외로워?"
"아닌 거 알잖아."
"아니, 몰라. 솔직히 난 지금도 너랑 이렇게 있는 거, 너무 힘들어."
"..."
"우리 헤어지던 날, 난 이미 정리 다했어. 붙잡을 거면 그 때 붙잡지 그랬어. 바쁘다며, 못 만난다며. 지금도 안 바쁜 거 아니잖아. 난 3년 동안 별 지랄을 다했는데, 너는 왜 너 생각만 하냐?"
"연락 못한 거, 내가 진짜 잘못했어. 그 때는 배우하겠다고 미쳐서, 보이는 게 없어서, 만약에 너가 싫다고 하면 나 이 일 그만 둘 수 있어. 진짜로."
"..."
"영재야, 제발..."
"...말 함부로 하지마. 지금도 이렇게 맘대로 하는데, 니 주변은 생각안해? 난 니가 쌓아놓은 거 다 끝날까봐 항상,"
"상관없어."
"넌 그게 문제야. 항상 너 좋을대로만 생각하잖아."
영재가 한숨을 쉬었다. 임재범은 지금 제 위치를 모르는 게 틀림없다. 태평한 소리를 내뱉는 입이 얄미웠다. 그걸 알리 없는 재범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영재의 손을 붙잡았다. 영재는 차마 뿌리칠 수 없어 어색하게 손을 빼냈다.
"재범아, 난 니가 행복했음 좋겠어."
"...나도 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같이 있으면 행복할 수가 없으니까 하는 소리야."
"..."
우리는 희망이 없잖아, 재범아. 영재가 기어이 흐르는 눈물을 벅벅 닦았다. 우리는 친구로도 남을 수가 없다. 그건 임재범이 더욱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 그게 더 아팠다.
"알아들었으면, 나가주라."
제발, 다시는, 보지말자. 끅, 끅 올라오려는 울음을 입술로 꾹 눌러 참은 영재가 아무 말이 없는 재범을 가만히 기다렸다. 후드를 뒤집어 쓴 재범이 고개를 푹 숙이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작게 떨리는 어깨를 토닥이지 못해서 영재는 그냥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잘 지내."
물기어린 목소리가 딸랑이는 문의 종소리와 함께 잦아들 때쯤 영재는 문득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빨간 전자시계는 마침 1시 30분에서 31분으로 바뀌었다. 31분, 이도저도 아닌 시간. 30분이라기엔 넘치고, 35분이라기엔 모자라다. 우리는 딱 그랬다. 그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에서 임재범과 최영재는 각자 30분과 35분을 향해 달렸다.
1분 1초. 사소한 틀어짐으로 인해 시간이 달라져버린 두 톱니바퀴는 더 이상 맞물릴 수가 없다. 뒤틀린 그 틈에서 우리는, 절대로 맞물릴 수가 없다.
가만히 시계를 노려보던 영재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는 32분이 된 시계에서 눈을 뗀 영재는 가방을 챙겼다. 그리곤 느릿하게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자마자, 목 놓아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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