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이야기는 언젠가..
"형, 저 진짜 소원인데."
"...뭔데?"
"이번에 수능 잘치면 저랑 사겨요."
뭐? 진영이 코웃음을 쳤다. 공부도 못하는게 딜을 하네, 까져가지고.
"아 왜요 저 하면 하거든요?"
"오늘은 왜 그 얘기 안나오나 했다. 그래, 그렇게 잘하면 제발 보여줘봐."
과제준비때문에 바빠죽겠는데 얘까지 난리야. 진영은 유겸의 이마에 딱밤을 때리고 과제를 하기 위해 켜놨던 노트북을 덮었다.
"문제 풀라고 시간줬더니 그런데다 머리굴리고있지? 매겨서 틀리면 문제당 딱밤 한대씩."
아 진짜 너무해. 울상을 지으면서도 문제집에 코를 박는 유겸을 보고 머리를 꾹 눌러준 진영은 슬쩍 웃었다. 귀엽다, 귀여워.
'명문대 다니는 옆집 형'이라는 이유로 팔자에도 없는 고3 공짜과외까지 해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거야... 과한 친절은 자신에게 화가 된다는 것을 진영은 뼈저리게 느끼고있는 중이었다. 사실, 대학때문에 혼자 서울로 올라온 저를 이것저것 살뜰히 챙겨주시는 아주머니만 생각하면 과외정도야 기꺼이 할 수 있지만, 그 과외받는 고딩 하나가 문제지. 어디서 배워왔는지 온갖 플러팅이란 플러팅은 끌어모아 자신에게 써먹는게 분명했다. 특히나 유겸이 첫날부터 형네 집에서 과외를 하겠다고 들이닥치는 바람에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취생의 서러움이란.
"너 진짜."
"아 왜요 또."
"또? 또는 내가 할말이고, 이 말 지지리도 안듣는 고딩아."
"근데 형 오늘 귀엽게 입었네요."
"오늘 올 때 이 페이지까지 다풀어오라 했지."
"저번에 그 파란색 후드도 진짜 귀여웠는데."
모자 한번만 써주면 안돼요? 눈을 빛내는 유겸을 차마 때릴수는 없어서 진영은 주먹을 내리며 애써 웃었다. 착한 내가 참자.
"수고했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형이 오늘 좀 나가봐야해서."
"어디가요?"
"알아서 뭐하게?"
"설마 '유겸아, 나 사실 애인있었다.' 막 그런거 아니죠? 형 나 버리지마요."
"니 머릿속엔 이미 너랑 나 결혼까지 했지? 우선 내 의견부터 물어봐야하는거 아니냐?"
"제가 이래도 싫다고 안하길래, 좋아하나보다 했죠."
싫은게 아니라고해서 다 좋은거니. 진영이 유겸의 볼을 꾹 잡아당겼다.
"내일은 꼭 문제집 다 풀어와라, 얼른 가."
"형, 저 심심한데 그냥 제가 형 집 지키고있을까요?"
"헛소리 그만하고 일어나자."
"그럼 뽀뽀해주면 갈게요."
"그래, 유겸아 얼굴내밀어봐. 주먹 날리게."
아 너무해! 갑자기 유겸이 입술을 내밀며 진영에게 안기자, 퍽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간 진영이 제 위에 엎어진 유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가까운 두 눈 사이에 묘한 침묵이 오갔다.
"...야."
"헐, 죄송해요."
세게 부딪힌 입을 가리고 허둥지둥 곧장 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유겸을 보고 진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뭔가, 뭔가 짜증이 났다. 그게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런 미묘한 느낌은 유겸이 3번째 집에 오는 날까지 지속되었다. 김유겸은 이제 사귀자고 조르지도 않았고, 후드티를 입은 저를 보고 감상평을 남기지도 않았다. 뭐야, 나 좋다고 매달릴땐 언제고 이제와서 얌전한척이야? 진영은 종이에 끄적대고 있는 동그란 머리통을 보았다. 문제 열심히 푸는것도 아니면서.
"겸아,"
"네?"
놀라 딸꾹질을 하듯 어깨까지 들썩거리는 행동에 진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뭘 그렇게 놀라.
"너 키스 해봤어?"
키, 키 뭐요? 유겸은 태연한 진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 저 오늘은 숙제도 해왔는데 갑자기 왜그래요, 무섭게.."
"그냥 뭐, 키스도 아니고 고작 실수로 뽀뽀 한 번 했다고 이렇게 어색해지나 싶어서."
"고작이라니, 저는 그 때 진심 떨려죽을 뻔 했거든요?"
"그랬어? 몰랐네. 너가 그러고 바로 도망가길래 별로여서 그러는 줄 알았지."
"말이 돼요? 제가 얼마나 해달라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건 그렇지, 근데 막상 해보니까 좀 그랬어? 왜 도망갔어?"
"그거야 형이 많이 화났던 것 같아서.."
웃겨, 언제부터 그렇게 내 의견 잘 반영했다고. 그리고 화난 것 같으면 사과를 해야지, 이 자식이 정말.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린 진영은 입이 툭 튀어나온채로 샤프만 꾹꾹 눌러대고있는 유겸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거야?"
"뭘요?"
"이렇게 계속 뻣뻣하게 굴게?"
"...형도 사실 그리웠죠? 제가 형 좋다고 안하니까."
갑자기 윙크를 해대며 안겨오는 유겸을 밀어버린 진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일부러 그랬냐?"
"그냥 뭐, 형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고."
그래? 반문한 진영이 유겸의 뒷덜미를 잡고 제 눈앞까지 당겼다. 당황한 유겸이 급하게 진영의 셔츠앞자락을 붙잡자 진영이 눈을 접어 웃었다.
"왜, 진짜 해보자. 싫어?"
"그런건... 아닌데."
아니긴. 커다란 등을 잔뜩 움츠린 유겸을 보고 웃은 진영이 유겸의 목덜미를 한 번 주무른 뒤, 목을 놓아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유겸을 진영이 턱을 괴고 쳐다보았다.
"근데 갑자기 왜 저 유혹해요, 이제 좀 사귀고 싶어졌어요?"
"수능 국어 1등급 받으면 생각해볼게."
"생각만 하지말고 약속을 딱 해줘요."
"그래, 그래, 사겨. 자, 이제 문제 풀자."
"형, 지금 무시하는거죠? 그 말 후회하게 만들거예요."
"그래, 나도 소원이다. 제발 후회하게 만들어주라."
그제서야 눈에 불을 켜고 문제를 노려보는 유겸을 보며 웃음을 터트린 진영은 노트북을 켜 과제를 시작했다.
"...미친."
심각한 표정으로 성적표를 쥐고 벌떡 일어난 진영을 유겸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형, 약속 지켜요.
"유겸아 혹시 컨닝이나 그런거 한 거 아니지?"
"아 진짜 나 뭘로 보고. 그래도 저 법은 잘 지키는 사람이거든요?"
"그럼 맨날 5등급 받아오던 애가 1등급이 어떻게 돼?"
"저 사실 저번 모의고사때부터 1등급이었는데."
아. 진영이 깨달은 소리를 냈다. 유겸아 죽고싶냐? 왜 말 안했어. 형 놀래킬려고. 눈을 접어가며 꺄르르 웃어대는 얼굴이 얄미워 진영은 유겸의 어깨를 퍽 때렸다.
"그럼 오늘부터 사귀는 걸로?"
"무슨 소리야, 너 아직 열아홉이잖아. 난 미자랑 못사겨."
"진짜 형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요."
"유겸아, 그러다 한 대 치겠다? 나 형인거 잊지마라."
"으, 짜증나."
잔뜩 노려보는 유겸의 눈빛을 본 진영이 양 손으로 유겸의 볼을 붙잡은 뒤, 유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뗐다. 데구르르 굴러갈 정도로 동그랗게 커진 눈을 보고 진영이 눈을 접어 웃었다.
"헐?"
"어쨌든, 선물은 줘야지."
"선물은 좋은데, 원래 약속이랑 다르잖아요. 사귄댔으면서..."
"1월 1일날 니 소원 들어줄게."
"...진짜죠?"
그럼 그 날 사귀는거 플러스 뽀뽀 10번, 오케이?라며 새끼손가락을 들이미는 유겸에게 진영이 손가락을 마주걸었다. 순수한건지, 바보인건지... 진영은 조용히 속으로 말을 삼켰다.
"나 왔어요. 이거 엄마가 형 갖다주래요."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그리고 이제 안주셔도 된다고 그래. 집에 과일 많다고."
"그럼 내가 올 명분이 없어져서 안돼요."
수능이 끝났음에도 12월 내내 제 집마냥 뺀질나게 드나드는 유겸을 보고 웃은 진영은 귤 한 박스를 식탁에 올려두고 거기서 몇 개를 꺼냈다. 같이 먹자, 방에 가 있어. 네에.
귤을 먹던 유겸은 조용히 책을 읽는 진영의 무릎 아래에 파고들어 누운 뒤 진영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잘생겼다, 형."
"알아."
"형 친구들한테 재수없다는 소리 많이 듣죠?"
"다 질투하는거지."
"와, 진짜 대박."
박수를 짝짝 치며 웃는 유겸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자 유겸이 이마를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악, 진짜 미리 예고 좀 해줘요, 마음의 준비 좀 하게! 왜에, 싫어? 하지말까?
"아니요, 더 해달란 말이었는데."
"다음 기회에."
"그냥 내가 하면되지."
"그럼 내일 문 잠근다."
너무해! 어떻게 한 번을 안져줘요? 김유겸, 넌 영원히 날 이길 수 없어. 눈을 접어 웃는 진영을 올려다보며 유겸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어차피 내일 사귀는 날인데, 미리 연습하면 좋잖아요.
"안돼."
"겁나 단호하네."
아무튼, 형 내일 시간 비워요, 저 진짜 마음 먹었거든요? 가만히 듣던 진영이 눈가에 주름이 패이도록 웃음을 터트렸다.
"아 왜 웃어요!"
"아 진짜, 너무 웃겨, 유겸아 뭐 마음 얼마나 먹었길래 그래. 기대되게."
"기대하세요. 근데 저 12시 되자마자 형 집 와도 돼요? 아니다, 그냥 여기서 밤샐까?"
땡글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말하는 유겸의 볼을 꾹 눌러준 진영이 귤을 유겸의 입 안에 넣어주었다. 나 내일 하루종일 집에 있으니까 푹 자고 천천히 와.
진영이 새해를 맞아 대청소를 하고, 씻고 나와서 커피를 한 잔 한 뒤, 책의 절반을 읽고 난 즈음에서야 벌컥 열리는 현관문소리에 진영이 슬쩍 웃고 책을 계속 보았다. 하지만 한참을 지나도 들리지않는 발소리에 진영이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자, 유겸이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있었다.
"안오고 뭐해, 그놈의 뽀뽀 열 번 해야지."
"형, 성인 된 기념 키스로 업그레이드 콜?"
"유겸아, 너 경험은 있니?"
이씨... 유겸이 세모눈을 뜬채로 입을 꾹 다물었다. 자존심 스크래치나는 소리 다들린다. 진영이 그 모습을 보고 터트리듯 웃었다.
"이리 와."
으응, 응, 유겸의 앓는 소리가 입 사이로 터져나왔다. 진영이 목에 매달리는 유겸의 허리를 단단히 잡아준뒤 침대 위로 천천히 눕혔다. 색색거리며 페이스를 맞춰가던 유겸이 진영의 팔을 덥썩 잡았다.
"왜, 왜 눕혀요?"
"그냥 키스 10번을 섹스 1번으로 퉁치면 안되나?"
"와, 갓 성인된 애 꼬셔놓고 그게 할 말이에요?"
"미안하지만 난 꼬심 당한입장이거든."
"그게 그거죠."
"그리고 농담이야."
"농담은 무슨, 그걸로 퉁쳐요."
"뭘?"
"방금 말한거요."
방금 뭐? 눈을 가느다랗게 뜬 진영이 유겸을 향해 슬그머니 웃자 유겸이 질색을 했다. 어우, 저 눈웃음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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