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태경!"
처음부터 알아챘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그날 밤, 아주 조용히 얽히는 시선이 그랬다.
"안녕. 이거 먹어."
"아뇨, 괜찮,"
"먹어라."
좋은 말로 할 때. 신우가 짐짓 무서운 표정을 했다. 태경은 어쩔 수 없이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초코롤빵을 받았다.
저 선배는 3학년인데 공부 안 하나..? 태경은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2학년이 됐는데도 태경은 여전히 친구가 없었다. 사실 그다지 절실하지는 않아서 태경은 앞으로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 나타난 부회장이라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처음엔 부회장인지도 모르고 명찰색이 초록색인 사람이 2학년 5반 위치를 알려달라기에 없던 친절함을 끌어내서 알려줬었다. 그게 딱 우리 반이었으니 가는 길에 겸사겸사.
"여기에요."
나름 친절하게 알려줬는데 대충 고개만 끄덕하고 가는 그 사람을 태경은 코너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정확히 그다음 날부터 점심시간에 밥 대신 잠을 자는 태경의 책상 위에 빵이 한두 개씩 올려져 있기 시작했다.
처음엔 태경은 주인이 있겠지 싶어 그대로 자리에 뒀었다. 그런데 3일쯤 지나자 더 이상 책 둘 곳이 없어진 태경은 점심시간에 잠을 안 자고 버텨보기로 했다. 이거 혹시 신종 괴롭힘인가...?
그렇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잠을 포기한 결과는 어이없었다. 저번에 보았던 3학년 부회장이 빵을 들고 반 입구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서성이는걸 태경이 딱 붙잡았다.
"어, 안녕."
"제 책상에 계속 빵두신거 선배님이셨어요?"
음, 어, 그니까, 뒷머리를 긁적이며 더듬더듬 할 말을 찾는듯한 부회장의 모습을 태경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거 먹을래?"
아뇨, 앞으론 안주셔도돼요. 태경이 말하자 신우는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냥, 좀 먹으라면 먹어."
빵을 태경의 품에 던져넣은 신우가 휙휙 걸어 나갔다.
...어제는 크림빵이더니 오늘은 딸기샌드네. 태경은 딸기샌드를 우물거리며 신우의 딸기마냥 새빨간 귀를 떠올렸다.
이후로 신우는 태경이 자든 말든 빵을 건네곤 말없이 사라졌다. 말을 걸려고 하면 하도 재빠르게 사라지는 통에 태경은 멍하게 신우의 뒤통수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이제 태경은 받은 빵을 먹으면서도 슬슬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누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했는데... 일주일 넘게 똑같은 상황에 더는 참을성이 없어진 태경은 뒷문에서 몰래 기다리다 또 빵을 들고 들어오려던 신우의 팔을 탁 잡았다.
"아 깜짝이야."
"원하시는 게 뭔데요?"
"뭐?"
"원하는 게 있으니까 저한테 이러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잠시 망설이던 신우는 교복 바지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뭐예요?"
"번호."
"네?"
"번호.. 알려달라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도 되고."
...싫으면 말고. 내민 핸드폰을 가져가려는 신우의 손을 탁 잡은 태경은 핸드폰을 받아들고 톡톡 번호가 틀리지 않게 조심히 눌러 다시 돌려주었다.
"이거 내 번호니까, 연락해."
전화 연결음이 들리는 걸 확인한 신우가 빵을 사물함 위에 내려놓곤 반을 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게 보던 태경은 정작 원하는 게 뭔지 대답을 못 들었다는 생각에 아차 싶어 애꿎은 빵 봉지만 꾸깃거렸다. 진짜 뭘까, 저 사람. 전화번호부에 부회장이라 썼다가 지운 태경은 잠깐 생각하다 부회장의 명찰에서 보았던 노신우로 바꿔 저장한 뒤 다시 잠이 들었다.
태경은 주말맞이 방 청소를 하다 가방에서 어제 신우가 준 빵을 발견했다. 가만히 보던 태경은 결국 하려던 청소를 그만두고 침대에 털썩 누워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이 사람은 나랑 뭘 하고 싶은 걸까. 태경은 한참이나 핸드폰을 꼼지락거리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지, 그냥 물어보면 되는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같은 시간에 공부를 하던 신우는 핸드폰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번호가 뜨는 바람에 안절부절못하다 끊기기 직전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우태경?"
"네."
"...왜?"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하라면서요."
"아, 어. 그랬지. 어떤 건데, 수학?"
"아뇨. 선배가 왜 계속 저한테 먹을 거 사주는지 궁금해요."
"어...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거 물어봐."
"그게 제일 물어보고 싶은 건데요?"
"...그냥. 너 매일 점심 안 먹길래."
참나,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태경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뭔데."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어? 어, 어. 좋아."
"좋은 거예요?"
...응, 좋아. 늦게 들려오는 신우의 나즈막한 목소리에 태경은 살짝 웃었다. 웃기는 형이야.
태경은 오늘따라 왠지 모를 두근거림에 점심시간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월요일이라 그런가, 시간도 더럽게 안 가는 것 같고. 태경은 짧은 제 손톱을 물어뜯었다. 사실 토요일 통화 이후 아무 소리 없이 잠잠한 핸드폰이 태경을 조금 언짢게 만든 탓도 있었다. 빵 살 돈으로 연락을 더 하는 게... 태경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드디어 점심시간 종이 쳤다.
우르르 몰려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태경은 얌전히 자리에 앉아 책을 폈다. 10분이 지나가자 태경은 읽던 책을 덮고 책상에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10분이 더 지났을 즈음 결국 벌떡 일어난 태경은 터벅터벅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오늘 진짜 무슨 날인가,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건지. 태경은 슬쩍 매점 입구에 고개를 내밀었다.
원래 칼같이 반으로 왔었으면서. 태경이 입술을 삐쭉였다. 딱히 엄청나게 기다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신우를 찾지 못한 태경은 터덜터덜 반으로 돌아와 책상에 엎드렸다. 뭐야, 어디 아픈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 때쯤 쿠당탕 소리에 놀라서 뒤돌아보니 신우가 숨을 몰아쉬며 문에 기대있었다.
"미안. 오늘 수업이 좀 늦게 끝나서."
"뭐예요. 사람 기다리게 해놓고."
"기다렸어?"
"그냥 뭐."
암튼, 됐어요. 난 또, 무슨 일 있나 했네. 다시 책상에 고개를 파묻은 태경의 어깨를 신우가 다가가서 톡톡 깨웠다. 태경은 그제야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고개를 들었다. 왜요?
"그.. 혹시 오늘, 같이 집 갈래?"
"네. 좋아요."
신우의 3학년 추가자습 시간을 기다리던 태경은 멀리서 뛰어오는 신우의 모습에 활짝 웃었다가 표정을 얼른 숨겼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아니에요, 어차피 저도 공부 좀 더 하고 싶었고. 빨리 가요, 형."
어, 응, 가자. 신우는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물쭈물하다 앞으로 걸어가는 태경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말없이 걸어가던 중 어색하게 내리고 있던 서로의 손이 살짝 스치자 화들짝 놀란 신우가 급하게 손을 거뒀다. 아, 미안. 태경은 그걸 빤히 보다 이내 앞을 바라보았다.
"형, 혹시 연애해봤어요?"
"...어."
"거짓말."
진짜거든? 잘 가다가 우뚝 멈춰선 신우가 꼼지락거리던 손으로 가방을 꾹 눌러 잡았다. 태경이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었다. 거짓말할 거면 귀나 빨개지지 말든지. 태경은 말을 삼켰다.
"좋겠네요, 전 모쏠인데."
"한 번도 없어?"
"네."
어차피 별로 만들고 싶지도 않고.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신우의 얼굴을 슬쩍 본 태경이 또 웃었다.
"근데 뭐, 또 모르죠?"
"그게 무슨 말,"
"어, 고양이다."
태경이 놀이터 그네 밑에서 졸고있는 고양이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잠깐 고양이 보고 가도 돼요?"
"응."
신우는 입을 달싹이다 그냥 태경의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았다. 오늘 집에 같이 가게 되면, 분명 준비한 말이 정말 많았는데. 태경의 앞에만 서면 저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신우는 한숨을 몰래 푹 쉬었다.
놀이터 그네에 나란히 앉은 둘 사이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고양이는 이미 가버린 지 한참이었다. 아까부터 조용한 태경을 신우가 슬쩍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해?"
"...저 또 궁금한 게 생겼어요."
"뭔데?"
"형 혹시 저 좋아해요?"
신우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귀를 가렸다. 신우의 손가락 틈으로 새빨개진 귀가 보였다. 아무리 둔한 태경도 그 정도 의미는 알 수 있었다.
"...나 좋아하는구나."
"아니거든?"
"나 이제 형 패턴 알 것 같아요."
"네가 뭘 알아."
"부끄러우면 귀 빨개지고, 맞는 말 하면 부정부터 하고. 맞죠?"
아니거든. 신우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또 아니라는 거보니까 맞네, 뭐. 태경은 씩 웃었다. 저도 좋아해요.
"어?"
"다 들었으면서. 내일부턴 같이 매점 가요. 나도 형 빵 사줄래요."
이제 가요. 태경이 손을 내밀자 그 손을 빤히 보던 신우도 천천히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끝에서부터 심장이 뛰는 기분이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려는 간지러운 웃음을 꾹 눌러 담은 신우는 대신 태경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가로등 아래서 점점 커지는 둘의 심장 소리가 멈출 줄을 모르고 커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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