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태] 그림, 그림.
  • 2021. 12. 30. 14:04







  • "아, 다온이형? 오늘 바빠서 못 올걸?"


     왜? 너 설마 형땜에 안 오려는 거 아니지? 야 무조건 와! 시운의 말에 태경은 그냥 웃어넘기곤 전화를 끊었다. 결국 죽어라 고민하던 태경은 오후 늦게서야 학생회 총동창회에 갈 채비를 했다. 자그마치 7년이다, 7년. 태경은 머리를 말리면서도 지금까지도 신경 쓰고 있는 스스로가 웃겨서 헛웃음을 지었다.

     코트를 껴입고 방을 둘러보는데, 문득 다온의 그림이 눈에 띄었다. 어린시절 신다온이 그려준 제 얼굴은 태경의 자취방 한구석에 여전히 자리잡고있었다. 웬만한건 전부 다 버렸는데도 저 그림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서, 태경은 제가 찍은 여행 사진 옆에다 붙여놓았다. 다온이 이 그림을 주던 순간이 사진마냥 태경의 머릿속에 찍혀있어서 더욱 버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태경은 씁쓸하게 웃으며 집을 나섰다.















     그림, 그림.















    "어, 우태경 여기!"


     태경이 도착하자 반갑게 맞은 시운은 이미 부어라 마셔라 하는 중이었다. 온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소맥을 말고 있는 모습을 보며 웃던 태경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테이블을 둘러보았지만,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인 건지 뭔지. 태경은 애써 복잡한 마음을 숨기고 술을 들이켰다.





    아.



     웅성거리는 입구를 슬쩍 쳐다본 태경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칠 뻔했다. 환히 웃으며 친구들을 안아주는 다온을 멍하게 보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제가 알던 그때와 너무 그대로라서, 태경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다온은 저를 봤는지 못 봤는지 조금 떨어진 대각선에 자리를 잡았다. 태경은 앞 접시에 놓인 고기를 꾹꾹 눌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맛있었는데, 이젠 하나도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도 태경은 눈을 접시에 고정한 채 억지로 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최악이야. 오지 말걸.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태경은 결국 한숨을 쉬며 짐을 챙긴 뒤 시운의 눈을 피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깃집 구석 담벼락에 기대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뛰어나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형이었다.


    "...오랜만이네, 태경아."

    "응."


     날카로운 바람이 볼을 스쳤다. 다온은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피는구나.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 태경은 그런 다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온이 불을 붙이려다 아차 싶은 얼굴로 태경을 보았다. 몸에도 안 좋고, 냄새도 나는데, 담배를 왜 피우는지 모르겠어요. 18살의 어린 태경이 스쳐 지나갔다.


    "아, 미안, 원래 잘 안 피우는데, 좀 피곤하면 찾게 돼서..."

    "...나 신경 쓰지 말고 펴."


     그딴 변명을 왜 나한테 하냐고, 못되게 말하고 싶은데 입이 잘 안 떨어졌다. 오히려 피곤한 이유가 묻고 싶어진 태경은 그냥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죽도록 싫지만, 그 사람이 신다온이라면 또 괜찮았다. 태경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웃겼다.


    "아냐, 어떻게 그래. 너 담배 냄새 싫어하잖아."


     결국 담배를 집어넣은 다온을 보며 태경은 또 입술을 깨물었다. 그놈의 배려, 그놈의 다정함. 그것 때문에 나는 그 7년 동안 지독하게 신다온을 잊지 못하고 살았던 거였다.


    "...형."

    "어?"

    "다정한 척 하지마."


     끝을 흐리는 목소리에 당황한 다온은 고개를 숙여 태경의 얼굴을 살폈다. 고개를 더 푹 숙인 태경은 울컥 올라오려는 감정을 꾹 삼켰다. 나는, 잊으려고 온갖 짓을 다 했는데, 왜 형은.


    "태경아."

    "왜 형만 멀쩡하냐고."

    "...내가 진짜 멀쩡했으면 여기 안 왔어."


     태경은 말문이 막혀 다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까만 머리카락 밑으로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보였다. 태경이 다온을 마지막으로 봤던 날, 다온은 유학을 갈 거라고 말했다. 가서 최소한 졸업할 때까지는 연락도 안될 거라 했다. 태경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형은 항상 바쁘니까.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다. 다온은 아무 말이 없었고 태경은 울음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꾹 눌러 잡았다. 사실 태경은 다온을 두고 돌아설 때까지도 다온이 저를 잡아주길 바랐다. 매사에 이성적인 형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정적이 흘렀다. 이제는 둘 사이에 메꿀 수 없는 공간이 많이 생겼다. 고개를 푹 숙인 태경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토닥여주던 시운의 위로가 생각이 났다. 거짓말. 그럴수록 더 또렷해졌고 형의 얼굴이 잘 때마다 둥둥 떠다녔다.


    "보고 싶었어, 태경아."


     제가 그리도 좋아했던 다온의 단정한 고백에도 태경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들지 않았다. 차라리 말을 거는 다온을 모른 척하는 게 더 좋았을 뻔했다. 아니, 그냥 이 동창회에 나오지 않았어야 했다. 끝이 보이는 만남은 애초에 시작을 말아야 했는데.


    "형, 나 먼저 갈게. 몸이 좀 안 좋아서."

    "왜, 많이 아파? 감기야?"

    "아니, 됐어. 갈게."

    "잠시만,"


     팔을 붙잡아오는 다온을 밀어내고 태경은 곧장 차로 걸었다. 걸어가는 동안 태경은 그에게 괜찮은 표정으로, 괜찮은 대답을 했었는지 상기해야만 했다.















     태경은 취미로 미술을 했다. 처음부터 딱히 흥미는 없었지만, 그 사람이 그림을 그려서. 그래서 미술을 선택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신다온과 좀 더 가까워지고, 닿고 싶었다. 그다지 순수한 의미는 아니지만 한번 시작한 미술은 목적을 잃었음에도 햇수로 벌써 8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태경 씨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네, 안녕하세요."


     가지런한 얼굴의 선생님은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 분명히 저보다 나이가 많은데. 마치 처음 만났던 신다온처럼. 태경은 곧바로 한숨을 쉬었다. 자꾸 모든 상황을 다온과 연결하는 버릇은 손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었다.

     실력이 늘지는 않아도 꾸준히 주에 2번은 들리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선생님과는 생각보다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같은 성별의 선생님이라 더 편하게 굴었던 것도 있었다. 신다온과 헤어진 날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펑펑 울며 전화를 받았고, 선생님은 바로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선생님의 차 안에서 나는 목구멍에서부터 울컥거리며 밀고 나오는 울음을 모두 뱉었다. 선생님은 가만히 안아주기만 했다.


    "오늘 여기까지 할까요."

    "네.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데려다 드릴게요."


     태경은 그의 말에 잠깐 고민하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 시간이 늦으면 같이 학원 문을 닫고 데려다주기도 해서 특별할 건 없었지만, 태경은 이런 호의를 매번 경계하기는 했다. 어릴 적 신다온이 준 호의에 착각했던 그때의 기억 때문에, 이제 태경은 어떤 것이든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되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표정이 안 좋길래."

    "아, 티 났어요? 별거 아니..."


     말이 이어지지 못한 채 태경은 제집 문 앞에 서 있는 인영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선생님,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조심히 가세요. 다급하게 인사를 건네곤 태경이 차 문을 탕 닫았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


    "태경,"

    "왜 왔어?"

    "누구야, 저 사람?"

    "형이 뭔데."


     뭔데 물어봐. 뾰족하게 날이 선 말은 신다온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박혔다. 상처를 줄수록 제가 더 아팠다. 신다온이 짓는 표정 때문에, 나는 또 상처를 받는다.



    "미안. 자격 없는 거 아는데,"

    "알면 그냥 가."

    "할 말 있어서 왔어."


     다온의 울 것 같은 눈이 하얀 입김 사이로 보였다. 그 눈을 보며 태경은 아마 평생 신다온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할 말이 뭔데?"

    "어... 태경아, 나 사실,"

    "혹시나 말하는데 다시 만나자거나 그런 말 하지마. 안 그럼 내가 너무, 상처받을 것 같아서."


     그 말에 다온은 입을 잠깐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태경은 그런 다온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쌍꺼풀 없는 눈두덩이가 보였다. 내가 아주 좋아하던 그 눈. 그 예쁜 눈을 나만의 것이라 여겼던 날이 있었다. 이제 나의 두 눈은, 나의 신다온은 없다.


    "...헤어지고 후회했어. 그때 너 붙잡을 걸 이런 생각도 많이 하고,"

    "형."

    "한 번만 다시 봐주면, 안돼?"


     태경은 다온의 간절한 눈빛을 피했다. 자꾸만 틈을 주는 다온이 미웠다. 혹시나 해서 갔던 동창회에서 보고 싶다는 말을 하는 신다온, 나를 간절한 눈으로 붙잡는 신다온. 나는 도저히 그걸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럼 그때 잡지 그랬어."


     나는 신다온의 걸림돌일 뿐이다. 천천히 잡아 오는 손을 내칠 수가 없어서 태경은 어색하게 손을 빼냈다.


    "태경아,"


     이제 오지마. 태경은 뒤돌자마자 입술을 깨물었다. 빠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꼭 참고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다온에게 들키지 않도록 앞만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 이후로 태경은 다시는 동창회에 가지 않겠노라 굳게 마음먹었다. 제가 얻고자 한 것보다 잃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태경은 일을 하다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가 뜨면, 잠시 고민하다가 받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잃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밤늦게 미술 수업을 마무리하고 선생님과 학원을 나서는데 계단 입구에 기대 서 있는 갈색 코트 자락이 보였다. 무시하고 가려던 태경은 결국 그 자리에 멈춰서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은 말없이 태경을 토닥였다.


    "태경 씨, 저 먼저 갈게요. 얘기하고 조심히 들어가요."

    "네.."

    "울고 싶으면 전화해도 돼요."


     태경은 대답없이 눈인사를 했다. 이미 아까부터 울고 싶었던 태경은 그에게 절대 전화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태경은 이 행동이 그저 호의인지, 아님 다른 것인지 구분도 못 하는 그때의 우태경이 아니니까.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제가 존경하고 좋아했던 그 넓은 어깨가 그렇게 작아 보일 수가 없었다. 형이 도대체 왜 그러고 있는데. 태경은 화를 벌컥 내고 싶은걸 참았다.


    "태경아."

    "..."

    "얼굴 보고 싶어서.. 맘대로 와서 미안해."


      신다온은 연애할 때도 그랬다. 뭐만 하면 미안해를 입에 달고 살았다. 태경은 그게 너무너무 싫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건데. 뭐가. 뭐가.


    "안 만나도 되니까, 그냥, 연락만이라도.. 하면 안돼?"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다. 그걸 알면서. 다온이 태평한 소리를 내뱉는 게 너무 얄미워서. 태경은 결국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짜, 너무 싫어, 신다온."


     내가, 내가, 얼마나, 헐떡이는 숨을 참아도 깊숙한 곳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서러움은 참아낼 방도가 없었다. 다온이 그런 태경을 급하게 껴안았다. 머리로는 백번이고 밀어내고 싶지만 제 마음은 밀지 말라고 한다. 태경은 제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울지마, 잘못했어, 미안해. 정신없이 쏟아내는 말과 토닥이는 손길에 태경은 마치 고3 때의 자신처럼 엉엉 목놓아 울었다. 다온과 있으면 언제나 그때로 돌아갔다. 우태경의 학창 시절 전부였던 신다온이 태경을 그렇게 만들었다.










     내일 얘기해.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된 태경은 벌게진 눈가를 꾹꾹 누르다 다온을 떼어내며 지친 눈으로 올려다봤다. 다온은 다시 태경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 안 도망가니까, 일단 가. 내일 다시 얘기해."

    "나, 너네집... 가면 안돼?"


     태경은 다온을 보았다. 7년간 너무나 그리워했던, 상상만 했던 그 얼굴.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그 두 눈동자. 내가 사랑하는 신다온.



     나는 신다온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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