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우 진짜 쪼잔한 놈..."
태경은 콧물을 훌쩍였다. 절대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추워서 그런거다. 추워서. 그 꼴을 보던 시운은 혀를 찼다. 집 앞 포장마차에서 저를 불러내 청승을 떤 지 벌써 2시간째다.
"또 뭔데."
그 말에 대답 없이 이미 다 퉁퉁불은 오뎅탕이나 뒤적거리던 태경이 젓가락을 탁 놨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말 안 하면 간다?"
그제야 태경은 소주를 원샷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끝 맛이 드럽게 쓰다.
"...노신우가 나 과팅나갔다하니까 뭔 짜증을 그렇게 내잖아."
"짜증만 내면 다행이지."
시운은 오뎅을 태경의 입에 쑤셔 넣었다. 아니, 그런 과팅이 아니고! 땜빵으로 나가 달라고 해서 잠깐 간건데.. 웅얼대는 태경의 입을 보던 시운이 고개를 저었다. 신우야 고생이 많다.
"그래서 싸웠어?"
"응.. 오랜만에 데이트였는데.. 하루종일 계속 틱틱대는거야. 그래서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 하고 왔어."
"오, 센데?"
"웃기지 않아? 내가 거기 가서 연애를 해, 뭘 해?"
날 그렇게 못 믿어? 태경이 또 소주를 원샷하고 이번엔 주먹을 꽈악 쥐었다. 술기운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태경의 주량은 넘긴 지 이미 오래였다.
"그럼 노신우가 과팅간다하면 좋겠냐?"
"걔가 과팅을 왜 나가."
"혹시 내로남불이라는 말 알아?"
"걔는 그런 거 나갈 애가 아니라니까?"
그래... 니 맘대로 생각해라, 술이나 먹어. 시운은 테이블 위의 소주잔을 채워주며 한 손으론 휴대폰을 꼭 쥐었다. 이걸 전화해, 말아. 해? 말아? 노신우는 저와 태경이 이 새벽에 같이 있다 하면 한걸음에 달려 나올게 뻔했다. 노신우가 걱정할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지만, 굳이 또 쉽게 둘을 화해시키고 싶진 않았다. 뭔 심보인지. 시운은 이제 고개를 푹 숙이고 거의 반 죽어가는 태경의 등을 툭툭 쳤다. 야, 집 가자. 벌써 두시다.
"남구웅, 2차 가자, 2차."
"2차 같은 소리하네. 노신우가 지금 니 상태보면 나 죽였을걸."
"신우? 노신우? 그 쪼잔한 노신우?"
"걔 보살이다, 진짜."
"전화 안 오는 거 봐. 진짜 짜증나."
태경은 결국 가로등 아래 잠깐 멈췄다. 에이씨, 진짜 전화 안 한다고? 태경은 징징 울리는 머리를 붙잡고 흐릿한 시야로 핸드폰을 켰다. 진짜로? 아니지, 카톡.. 카톡이 왔나.. 폰을 제 눈앞에 들이밀며 비틀거리는 걸 시운이 붙잡았다. 얠 어떡하냐.
"야 너 집 갈 수 있어?"
"못 가..."
"그래, 내가 봐도 못 갈 것 같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시운은 태경을 거의 들쳐메듯 안아서 집으로 향했다.
"노신우... 보고 싶다."
시운은 테이블에 널부러진 태경을 물끄러미 봤다. 그새 집에 있던 소주와 맥주가 모두 동이 났다. 우태경 이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니겠지? 시운은 태경의 눈앞에 손을 흔들거렸다. 야, 하지마아. 태경이 겨우 쥐어 짜낸 목소리로 시운의 손을 치웠다.
"그럴 거면 그냥 먼저 전화해라."
"...자존심 상한단 말이야."
"얼씨구. 노신우가 참 오냐오냐 키웠다."
"뭐래, 진짜."
부루퉁해서는 전화기만 붙잡고 웅얼대는 꼴을 보니, 아까 퉁퉁불은 오뎅탕이 생각났다. 그 귀엽지도 않은 불어터진 얼굴을 보면서 시운은 태경이 전혀 입에도 안 댄 쥐포를 잘근잘근 씹었다. 이쯤 되면 노신우한테 전화 올 때가 됐는데.. 얘도 이번엔 좀 세게 나오네, 우태경한테 화도 못 내는 애가.
"뭐 그럼 계속 연락 안 하다 이대로 헤어지던가."
강수를 두니 어깨부터 쪼그라드는 우태경이 보였다. 헤어질 생각도 못 하면서 존심은... 어쩔 수 없이 이 남궁이 또 나서줘야지. 시운이 태경의 핸드폰을 뺏어 1번을 꾸욱 눌렀다. 띠리링거리며 노신우 세글자가 떴다.
"야!"
"너 끊으면 우리 집에서 내쫓을 거야."
받아. 태경이 어버버한채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딱 다섯 번까지만... 기다리다 끊을 거야. 속으로 다짐한 태경은 조용히 신호음을 셌다. 하나, 두울, 세...
"...우태경?"
"노신우..."
반나절 만에 듣는 다정한 목소리에 울컥 눈물부터 나온 태경이 울먹이며 신우를 불렀다. 태경은 술기운이 더 올라오는지 뜨거워진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너, 너 울어?"
"...보고싶어."
"어디야."
"나... 여기이..."
턱을 괴고 가만히 저를 보고 있는 시운을 슬쩍 본 태경은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남궁 집..."
"뭐?"
갑작스런 큰 소리에 놀란 태경이 딸꾹질을 했다. 왜, 왜... 딸꾹.
"남궁 바꿔봐."
"너 바꾸라는데..."
야 우태경, 사고는 니가 다 치고 왜 내가 욕먹냐. 시운은 저에게 폰을 넘겨버리고 줄줄 새는 눈물을 찍어내느라 정신없는 태경을 흘겼다.
"어, 노신우."
"야 죽을래?"
"뭘 또 죽여. 나 아니었음 얘 길바닥에서 입 돌아갈 뻔했거든."
"술을 얼마나 멕인거야?"
"와, 내가 멕였냐? 지가 퍼먹은 거지."
"나 지금 데리러 갈 거니까 우태경한테 준비하고 있으라 그래."
"내가 문 안 열어줄 건데?"
"문 부서지는 거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해."
어우, 진짜 그럴까 봐 장난도 못 치겠다. 혀를 내두른 시운이 통화를 끊고 태경을 쳐다보았다. 입술은 퉁퉁 부은 채로 벌게진 두 눈두덩이를 비비고 있었다. 뜨끈한 오뎅탕이 간절하다. 시계는 4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남궁, 미안.. 나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울고 나니까 술 좀 깨나 보지?"
"응..."
"됐어, 노신우가 데리러 온대. 옷 입어."
뭐? 눈을 동그랗게 뜬 태경이 눈을 꾹꾹 눌렀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마중까지 나와준 시운을 고맙다며 한번 안아주고 차에 탄 태경은 신우의 눈치를 살폈다. 살얼음판이다... 살얼음판... 가만히 운전만 하는 신우 때문에 더 무서워진 태경은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았다. 일단 보고 싶다고 술김에 징징댔는데 노신우는 제 얼굴을 봐 주지도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태경은 갑자기 서러워졌다. 아니, 그놈의 과팅 한 번 잘못했다가... 다시는 하나봐라. 눈물이 나오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창밖을 하염없이 보다 보니, 곧 신우의 집에 도착했다.
"우태경, 할 말 없어?"
"..."
쇼파에 앉아 손만 꼼지락대며 입은 꾸욱 다물고 있는 태경을 보던 신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연락하지 말자며."
"그건, 니가 하도 틱틱대니까.."
"누가 먼저 잘못했는데?"
그 말에 태경은 눈썹을 축 내렸다. 사과해야겠지. 괜한 자존심을 더 부렸다가 이미 한바탕 난리를 친 새벽의 연장선이 되는 건 죽어도 싫었다.
"...미안."
"이리 와."
태경은 천천히 일어나 의자에 앉아있던 신우의 무릎 위에 마주 앉았다. 신우는 제 목에 팔을 감아오는 태경을 받아주며 따끈한 태경의 몸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나도 미안.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으응.."
"그래도 연락하지 말자고는 하지 마."
"으응..."
"남궁 집도 가지 말고."
"으응... 응?"
고개를 들려는 태경의 뒷통수를 꾹 누른 신우는 태경의 등을 몇 번 쓸어주다 천천히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손에 허리를 쭉 편 태경이 얼굴을 떼고 신우를 바라보았다.
"나... 졸린데."
"너 오늘 못 자는데? 니가 또 화나게 했잖아."
"또 뭐..."
"술 먹고 남궁 집 간 거."
"뭐야, 그게 왜,"
"그래서, 잘했다는 거야?"
아니.. 그렇게 말하면.. 우는소리를 하며 다시 안기는 태경의 목에 입을 맞춘 신우는 태경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 침대로 향했다.
지잉 지잉 울리는 진동음에 잠에서 깬 태경이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았다. 윽, 술 냄새...
"여보세요.."
"야! 잘 들어갔어? 안 싸웠고?"
"아 남궁, 어제는,"
"야, 우리 밤에 화해 엄청 했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전화 끊어. 얘 밥 먹여야 돼."
아, 진심 티엠아이 쩔어... 시운이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신우는 전화를 끊었다. 태경이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 눈을 접어 웃었다.
"뭐 좋아서 웃냐? 빨리 와서 밥 먹어."
"오 니가 끓였어? 뭐야, 콩나물국?"
"먹어봐."
"맛있다."
까치집을 지은 채 웃는 태경을 보며 웃음이 터진 신우는 태경의 앞에 앉아 국을 떠먹는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사실 연락하지 말라는 태경의 말에 홧김에 연락을 끊었다가 오히려 죽겠는건 저여서, 앞으로는 절대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태경한테는 어쩔 수 없이 져줘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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