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태경.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갑자기?"
침대에 널부러져 색색거리던 태경이 걸터앉아있는 시운을 올려다봤다.
"갑자기... 는 아니고, 그냥 오늘 말하고 싶어졌어."
"그래?"
"너는 어떤데?"
나는... 태경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시운은 그 모습을 잠깐보다 볼에 뽀뽀를 퍼부었다. 아 잠시만, 생각 좀, 야!
"이런 거 하면 싫었어?"
"아니, 싫었으면 너랑 왜 이러고 있겠어."
"그러면?"
음... 글쎄... 아 생각 안 할래, 머리 아파, 그냥 한 번 더 하자. 태경이 시운의 목을 감아 끌어당겼다. 태경의 하얀 목에 입술을 갖다 대면서도 시운은 마구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꾹 참았다.
처음에 너랑 왜 하게 됐더라. 지쳐서 잠든 태경의 몸에 이불을 끌어올려 준 시운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나는 좀 진심이었는데. 얘는 생각도 안 해본 것 같아서.
kiss my crush
"남궁, 혹시 자위해봤어?"
뭐라고? 시운은 먹던 차카니가 목에 걸릴뻔했다. 오늘 4교시 성교육 때 봤던 교육자료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그냥 나 혼자 아주 잠깐, 진짜 쪼오금! 우태경 가지고 상상했던 거뿐인데. 갑자기 소름이 돋은 시운은 태경을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그걸.. 왜 물어?
"아니, 나 사실 한 번도 안 해봤는데, 해봤나 싶어서."
...해보고싶어? 시운은 저 스스로 그런 말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팍팍 쌓이는 죄의식에 몸서리쳤다. 진짜 돌았구나, 남궁시운. 거기에 또 고개만 얌전히 끄덕이는 태경을 보고 시운은 그냥 울고 싶어졌다.
"오늘 우리 집, 올래."
"...응."
이거 꿈인가. 또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태경을 바라보던 시운은 제 볼을 꾹 꼬집었다. 아니네, 미친.
오늘... 고마워, 내일 봐. 제집에서 나가는 태경을 보며 손을 흔들어준 시운은 이제 정말로, 정말로 울고 싶었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근데 그만큼 더 좋아져서, 이리저리 만지면 만지는 대로 우태경의 그 작은 입이 벌어지는 게 예뻐서 시운은 인생에서 몇 번 안 해본 고민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운의 고민과는 다르게 그날을 발판삼아 태경은 더욱 과감해졌다. 우태경이랑 성교육.. 그래, 그냥 공부라고 생각하면 안될까. 시운은 약 한 달이 지나고 옆에서 홀딱 벗고 잠든 태경의 팔베개를 해줄 때까지도 그런 생각을 하다 한숨을 쉬었다. 이건... 진짜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 죽어라 고민하다 지른 게 고백이었다. 사실 시운은 그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아, 말하지 말걸. 그날 태경이 집에 가고 나서 애꿎은 베개나 쥐어패던 시운은 머리를 붙잡았다. 많이 당황했겠지. 친구한테, 그것도 남자한테 갑자기 고백받았으니. 뭐... 대딸도 해주고 섹스도 하는... 좀 오묘한 관계긴 해도 어쨌든 나를 친구 이상은 절대로 생각 안 해봤을 거다, 걔는. 우태경의 순간 흔들리는 눈동자가 시운의 뇌리에 박혔다. 에휴 왜 그랬을까...
그러나 시운은 그렇다고 이 관계를 계속 지속할 용기도 없었다. 태경을 볼 때마다 우태경에 대한 감정이 점점 더 선명해져서, 제 밑에서 올려다보는 우태경을 더 이상 아무렇지 않게 안을 수 없었다. 결국 안 돌아가는 머리를 미친 듯 굴려서 내린 결론이 이거였다.
"남궁. 오늘은 너네집 가도 돼?"
"아니. 나 약속 있어."
요새 바쁘다? 태경이 입을 삐쭉였다. 그 입에 뽀뽀를 할뻔한 시운은 대신 양 볼을 주욱 늘렸다. 바보야 야한 생각 그만해.
"야, 내가 무슨 야한 생각을 해?"
"우리 집 오면 뭐 하게?"
그거 말고도 얘기할 것도 있었거든? 약속 있으면 됐다, 뭐. 휙 돌아서는 태경을 본 시운은 태경을 다시 붙잡아 돌리고 싶은 걸 참았다. 요즘 태경을 일부러 피하기는 했다. 약속 있다, 가족 모임 있다, 집에 동생 있다...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변명도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피하지 않는다면, 그때 자신이 충동적으로 입 밖에 내버렸던 그 고백에 대한 대답을 태경이 해버릴 것만 같아서, 그리고 그 대답이 어떤 것인지 대략 예상이 가서. 시운은 도망을 택했다.
"야, 형이 주는데 안 먹을 거야? 괜찮다니까."
"아뇨, 술은 좀..."
아까부터 술을 권하지를 않나, 자꾸 만지지를 않나. 남궁은 약속이랍시고 강제로 나오게 된 모임에 짜증이 치밀었다. 야, 남궁, 나 한 번만 봐주라, 형이 너 잘생겼다고 한번 불러 달라고 해서, 한 번만! 처절하게 매달리던 친구의 말이 메아리처럼 허공에 퍼졌다. 하 내가 진짜 얘를 가만두나 봐라. 으슥한 놀이터 구석 정자에서 술판을 벌이는 형들 사이에서 비위 맞추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 집 가고 싶다. 특히 내 옆에서 쪼물딱거리는 이 새끼.
시운은 애써 웃으며 끈적하게 어깨를 감싸는 팔을 슬쩍 풀었다.
"야, 서운하게 왜 그러냐."
"아이 형 그게 아니라,"
허허실실 웃는 것에 도가 튼 시운에게도 좀 힘든 상대였다. 진짜 짜증 나게 구네. 경련이 올 것 같은 입꼬리가 서서히 낮아지고 있을 즈음,
"남궁?"
뒤에서 들리는 너무 익숙한 목소리에 시운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픽 웃음이 터졌다. 나를 진짜로 웃게 하는 목소리는 딱 하나밖에 없다. 뒤를 도니 가방을 야무지게 멘 우태경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태경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다. ...화났나?
"누구?"
"어, 그니까,"
"얘 친군데요."
저랑 선약이 있어서요, 가자, 빨리. 인사를 꾸벅하곤 말없이 팔을 죽 잡아끄는 태경에게 당황할 새도 없이 질질 끌려가던 시운을 멍하게 보던 남자는 아차싶어 급하게 전화 제스쳐를 취했다. 남궁, 나중에 꼭 연락해!
"나중에 연락 절대 하지 마."
"우태경 여기 어떻게 왔어?"
"누구야 저 사람?"
지꺼도 아닌데 어딜 만져. 태경은 시운의 말을 듣지도 않고 툴툴대며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안에서도 여전히 손을 꼭 잡은 채 종알종알 불만을 털어놓는 태경을 시운은 멍하게 바라봤다.
뭐해, 안 내리고? 정신을 차리니 제 자취방 앞이다. 태경은 자연스레 비밀번호를 눌렀다. 아, 들어가기 싫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듯 시운은 태경을 따라 천천히 들어갔다.
"...나 먼저 씻는다?"
시운은 또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태경과 안 한 지도 꽤 오래됐다. 심지어 야동도, 자위도 정신이 없어서 생각도 못 했다. 우태경 한번 피하겠다고 반강제적으로 금욕적인 삶을 살았네. 시운은 벌써부터 반쯤 서 있는 제 앞섶을 내려다봤다. 정신 차리자 제발.
"궁아, 안아줘."
솔직하게 말하는 태경이 좋았다. 우태경만 부르는 호칭이 좋았고 그 눈동자가 나를 향하는 게... 그게 전부 다. 시운은 태경의 볼에 뽀뽀를 했다. 가끔씩, 아니 거의 매일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주체를 하지 못할 때 시운은 태경에게 뽀뽀를 퍼부었다. 그러면 태경은 웃었다.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예뻤다.
태경은 마주 보고 하는 걸 좋아했고 저는 뒤로하는걸 좋아했다. 납싹 엎드린 허리 가운데로 도드라진 척추뼈를 만지거나, 골반 아래로 착 감겨오는 동그란 엉덩이를 구경하는 게 좋은 것도 있지만, 얼굴이 안 보이는 게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섹스 중에 갑자기 냅다 우태경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기 위해선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흐으, 응, 거기. 여기? 시운은 오랜만에 하는 바람에 끙끙대는 태경을 달래가며 착실히 만족시키면서도 평소와 다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늘 우태경이... 좀 이상하다.
"키스."
두 팔을 벌리며 키스를 조르는 우태경이라니. 좀이 아니라 많이 이상하다. 이때까지 별걸 다 했어도 키스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쾌감에 잔뜩 오므린 허벅지 안쪽을 움켜쥐자 앓는 소리를 내는 태경을 보면서 시운은 미친 듯이 고민을 했다. 나도 해주고는 싶은데... 해버리면 이 간당간당한 선마저 넘을 것 같아서.
"너 오늘, 이상한데?"
"그러게."
남 말하듯 넘기는 얼굴을 보며 시운은 입술을 다물었다. 더 안 물어야겠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상한 우태경. 시운은 말을 아끼고 태경의 입술 대신 목을 콱 깨물었다. 아, 궁아, 나, 으응... 다리를 움찔거리며 한숨 섞인 신음을 길게 뱉는걸 보고 나서야 시운은 태경에게서 빠져나왔다. 야, 근데 콘돔은 뭘로 만든 거지. 이상한 우태경과 있으니 저도 이상해지는지 별 개소리가 다 나왔다. 제발 입 열지 마라, 우태경.
"남궁."
"하지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우태경 피곤하지, 좀 자, 나중에 깨워줄게."
"안 피곤한데."
"..."
"너가 요새 막 나 피하던 거. 알고 있었거든?"
"알고 있었어?"
시운은 너무 놀라 소리를 빽 질렀다. 눈치 없는 우태경이라고 너무 간과했나 보다. 좀 더 멋들어진 변명을 해야 했나.
"응. 처음엔 왜 저러지 했다가, 너네집 안가니까 시간이 남아돌더라고. 그래서 생각 좀 해봤는데..."
"...그래서?"
벌써 이 타이밍이라고? 현실을 마주할 생각에 아득해진 시운은 침을 꼴딱 삼켰다.
"그래서, 음..."
시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 우태경에게 고백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럼 친구로라도 계속 남을 수 있었을까? 친구끼리는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하는 친구 사이로? 시운은 온갖 생각에 태경의 말이 들리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팽팽 머리가 돌았다.
"궁아,"
조용히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시끄러운 생각들은 멈추고 우태경의 새까만 눈동자가 반듯하게 마주쳤다.
"나도."
목적어도, 서술어도 그 무엇도 없는 말에 시운은 웃으며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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